뒤늦게 읽어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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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가진 깊이를 아는 데에 나의 깊이는 부족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한때 뜨거운 여름의 더위만큼 뜨거웠던 한 편의 소설이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이다. <채식주의자>는 수상 소식과 함께 불티나게 서점가에서 팔렸고, 지하철에서 어렵지 않게 책을 읽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명색이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는 과거 그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애초에 알지 못했다.), 당시 화제가 된 수상 소식을 계기로 그녀의 작품 두 개를 구매했다. 한 권은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맨부커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고, 한 권은 많은 추천을 받은 <소년이 온다>라는 책이다.


 솔직히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나는 쉽게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의 소설은 우리가 읽는 참고서처럼 읽는 속속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곱씹으면서 생각해보고, 그래도 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고개를 돌리게 될 때가 많다.


 나는 이번에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내가 본 부분과 볼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다. 모든 문학 작품은 책을 읽는 독자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고, 작가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본 부분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었지만,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책의 제목이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채식을 주로 섭취하는 채식주의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아니다. 일방적으로 건강한 몸을 위해서 일부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영혜는 자신의 꿈을 통해서 본 기이한 현상이 계기가 되어 채식을 선언한다.


 그런데 그녀의 채식은 흔히 생각하는 채식주의자의 습관과 달랐다. 완전히 육식을 끊는 동시에 일어난 그녀의 괴이한 행동은 가족과 멀어지게 했고,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고 하기도 했고, 정신병원에서는 점점 거식증의 상태로 발달해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코앞에 가진 충격적인 상태가 되어버렸다.


 <채식주의자>를 읽어가는 동안 영혜의 행동이 가진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어려웠다. 극적인 묘사를 통해서 장면 하나하나의 이미지를 그릴 수 있었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는 말처럼 작품 속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어려웠다. 나는 그저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보았다.


 영혜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고 한 육사 출신의 아버지, 영혜의 몽고 반점을 통해 영감을 얻어 모든 것 잃어버리고 만 형부, 그 형부의 아내인 영혜의 언니. 몇 사람은 한 장면에서 퇴장하기도 하고, 몇 사람은 이야기를 시점을 도맡아 마지막 장까지 그려가기도 한다. 나는 이런 장면에 주목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년느 단 헌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본문 197)


 그중에서도 특히 위에서 읽을 수 있는 영혜의 언니인 '그녀'가 독백으로 서술한 부분은 책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전문가는 어떤 분석을 했을지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문학 작품을 읽고 받아들이는 일은 독자 개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비교는 하지 말자.


 나는 '살아본 적이 없다'는 말을 통해서 영혜와 그녀와 그의 이야기를 이해했다. 자기학대를 통한 세상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그저 의미를 생각하지 않은 채 견디며 살아가는 것. 그러다 문득 우연한 계기로 영감을 얻어서 금단의 과실에 손을 대어버렸다가 무너지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내가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때는 어렴풋이 다가온다. 문득 어느 순간에 '나는 살아있는 걸까?'는 질문에 맞닥뜨려 괴로워하고,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해 외면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껴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방황 자체가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채식주의자>는 몇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충격적으로 이러한 모습을 전한다. 단순히 질문을 통해서 자아탐색을 하는 것이 아닌, 좀 더 내면 깊이 파고들면서 상처를 후벼 판다. 어쩌면 우리 또한 이런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기면서 괴로움을 숨긴 채….


 나도 멍청한 짓을 통해서 스스로 괴롭힌 짓을 한 적이 있었고, 그때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일은 결국 그런 일의 반복을 통한 자책이다. 지금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걸까? 문득 그런 고민을 하게 된다.


 맨부커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덕분에 읽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나는 아직 이 소설의 깊이를 파악하는 데에 부족했고, 나는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저 오늘을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깊이 있는 고민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소박한 블로거 노지를 응원하는 방법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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