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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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실천윤리


 지금 전 세계적으로 난민이 문제가 되고 있다. 유럽 국가 일부는 난민을 받아들여 주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일부 국가는 여전히 난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세계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특히 죽은 체 물에 떠밀려 온 3살 꼬마 난민의 사진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익사한 채 터키 해변이 밀려온 3살 꼬마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그동안 경제적 문제를 운운하면서 문을 닫고 있던 일부 국가가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서 문을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난민 문제는 아직 확실한 해결책이 없으며, 일부 국가에서 수용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게 현실이다.


 오래전에 <내 이름은 욤비>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통해 처음으로 우리 한국에도 많은 난민이 있으며, 대다수가 정식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지거나 불법 체류자가 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타 국가에 비난하지만, 우리 모습은 돌아보지 않는 거다.


 난민 문제는 윤리적 문제이면서도 우리가 계산기를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경제적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누가 돈이 되지 않는 사업을 하려고 하겠으며,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고 하겠는가? 일부 선량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노지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이런 문제의 핵심을 적절히 지적해주었던 책이었는데, 나는 그 책을 읽은 후에 또 다른 피터 싱어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이 바로,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이라는 제목으로 윤리적 삶을 다루는 책이다.


 책의 머리말에서 이미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책이 어떤 주제를 가졌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을 짦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 본성이 선하든 악하든 현대 서구 사회가 합리적이거나 윤리적인 논증이 통하는 시기를 훌쩍 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미친 세상, 바로잡으려 해봐야 헛수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중략) 제 생각이 틀렸더라도, 정신 나간 사람들이 제 생각보다 훨씬 흔하더라도, 우리에게 다른 대안이 있을까요?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윤리적 삶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안입니다. 윤리적으로 살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정치 이념에 헌신하는 것보다 더 영향력이 크고 효과적입니다. 윤리적으로 성찰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꼬치꼬치 따지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성찰하고 그 성찰의 결론에 따라 행동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p10)


 솔직히 우리가 윤리적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지킬 것은 지키고, 거짓말은 하지 않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고,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런 윤리적 삶이 때때로 바보 같은 삶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이미 알고 있다.


 처음 우리가 횡단보도 건너는 법을 배울 때는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오른손을 들고, 파란불이 켜지면 건너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한 살, 두 살 더 나이를 먹으면서 머리가 커지면 우리는 엄마의 손을 잡고 사람이 오지 않으면, 후다닥 빨간불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무단 횡단 하는 법을 배운다.


 이미 우리는 윤리적 삶에서 벗어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배워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예로 든 무단횡단은 우리가 아주 평범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례 중 하나이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책을 읽는 동안 좀 더 근본적으로 나는 윤리적 삶과 궁극적 선택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래의 사례 한 개를 읽어보자.


영어에 '부당하게 얻은 횡재'를 일컫는 말로 '트럭에서 떨어졌어(it fell off the back of a truck)'가 있는데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난한 남자가 현금 수송 트럭에서 떨어진 돈자루를 발견한 겁니다. 남자는 돈을 수송 업체에 돌려주었습니다. 업체는 잃어버린 사실도 모르고 있었죠. 언론에서는 남자를 영웅으로 치켜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신은 바보라고, 다음에는 제 앞가림이나 하라고 충고하는 편지와 전화를 수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삶의 유일한 목표는 일등이 되는 것이며 돈을 더 많이 벌어야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궁극적 선택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 선택권을 넘기는 것이죠. 그러면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삶의 방식을 고를 선택지가 줄어듭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돈을 더 벌 수 있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때면 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 꺼리는가 입니다.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릅니다. 터무니없게 들리겠지만 옳은 일을 하지 않으려 드는 이유는, 그랬다가는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까 봐서입니다. 물론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도덕적인 손가락질이 아니라 멍청하다는 손가락질입니다. 이런 반응 뒤에 윤리가 일종의 기만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두가- 한 발 양보해서 '거의' 모두가- 자신을 먼저 생각하니까, 윤리와 희생을 설교하는 사람들도 다를 바 없으니까, 자기도 똑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바보라는 것입니다. (p138)


 떨어진 돈 자루를 주워준 사람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아주 선량한 사람이다. 물론, 일부 사람은 그 돈을 당연히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일부 사람은 주인도 모르는 돈을 마음대로 하지 않은 게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금 당신은 이 사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나에게 같은 일이 있었다면, 아마 나는 돈을 몰래 꿀꺽할 확률이 조금 더 높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처럼 우리가 사림이 가진 개인 재산의 규모에 따라 삶의 척도를 평가받고, 대우받는 세상에서 아무런 리스크 없이 목돈을 쥘 기회를 놓치는 일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윤리적 삶의 잣대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 나 또한 내가 이기적인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은 '그래도 우리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권유하는 말뿐이다. 나를 향해 혀를 차며 '도덕적인 척하더니'이라고 비아냥거려도 반박할 수가 없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를 읽는 동안 제 잇속만 차리는 사회 속의 내 모습(어쩌면 당신도),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어디서 이런 문제의 원인이 생겼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좀 더 윤리적 삶을 위해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윤리적 헌신은 사람을 감동시키지만 그 목표에는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 중에는 일부는 실험동물이 아무리 고통을 받더라도 실험실에서 동물을 풀어주는 행위가 잘못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댐을 새로 짓든 안 짓든 국가가 사업을 계획하면 모든 국민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결코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낙태 논쟁에서 저는 인간의 생명을 어느 시점부터 보호해야 하는가에 대한 낙태 반대론자들의 견해에 반대하고, 낙태 시술을 하는 병원을 찾느라 애먹는 젊은 임신부의 감정이 무시당하는 현실을 개탄하지만, 낙태 반대론자들의 행동이 윤리적 동기에서 비롯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p244)



 우리는 자주 뉴스를 통해서 자식의 여자친구를 살해한 비정한 어머니의 이야기, 술에 취한 상태에서 렌터카를 몰다 8명의 사람을 친 이야기, 입시 원서를 빌미로 성추행한 부도덕한 교사의 이야기 등 갖가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식적으로 악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소식을 듣는다.


 윤리적 선택의 대부분은 우리와 관련된 사람과의 관계에서 벌어진다. 나는 이때까지 어느 정도 윤리적 삶을 지향했다고 자신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그런 삶을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도 그런데, 뭘.'이라며 작은 비도덕을 반복했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윤리는 쇠퇴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사실 특정한 윤리 규칙을 지키는 일이 줄었다는 말인데, 이 문제는 아직 유익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 오늘 소개한 책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는 지금 윤리적 인생관이 흔들리는 우리에게 그런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과거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서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책을 몇 권 읽어보았는데,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은 꼭 이런 책을 읽으며 우리가 한 번은 책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동은 작지만, 분명히 좀 더 나은 사회를 생각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책의 3장 '흥청망청의 끝'에서 읽은 한 문단을 남긴다.


서구 사회는 수세기 동안 물질적 풍요라는 성배에서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이 추구는 흥미진진한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귀중한 것들을 많이 발견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이치에 맞는 목표를 추구했다면 오래전에 목표를 달성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있음을 망각했습니다. 남보다 부자가 되는 것, 전보다 부자가 되는 것 말고 어떤 삶의 목표가 있을까요? 물질적으로 눈부신 성공을 거둔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성공을 거둔 뒤에 자신이 무얼 위해 그토록 땀을 흘렸나 하고 허탈감을 느낍니다. 애덤 스미스라면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질적 부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기만에 빠진 까닭이니까요. 진정한 이익의 관점에서 본다면 좋은 삶에 대한 통념을 바꿔야 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게다가 이 통념을 바꿔야 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통념이 형성되고 고착되던 시기에는 아무도 물질적 부나 소비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오류로 판명 나면서 좋은 삶에 대한 통념도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요? 당면한 생태적 위기로 인해 경제의 변화가 불가피해지면서 수세기 만에 우리는 이 물음을 성찰할 기회를, 잘사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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