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열네 살 소년 모모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도서 감상 후기] 자기 앞의 생, 우리는 슬프고 작은 행복이 있기에 오늘을 살아간다


 최근에 읽게 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라는 소설은 내가 자주 접하지 못했던 장르의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 모하메드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 소설의 이야기는 소년이 직접 눈으로 보는 자기 앞의 生(생)이다. 창녀의 아들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맡겨져 길러진 소년 모하메드(모모)의 눈으로 보는 그 이야기는 책을 도중에 덮지 못하도록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 생기고, 상처를 받는 사람이 생기고, 그 상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게 우리의 삶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아직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같은 곳에 살지 않더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생기게 되었다.


 글쎄, 그것도 바보 같은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람의 삶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생각으로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웃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은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단정지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단순한 생물이니까.


 《자기 앞의 생》은 14살 소년 모모가 자신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리는 동시에 자신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다양한 사람을 보는 이야기이다. 이런 문학 소설을 늘 읽으면서 글을 쓰는 사람은 나와 달리 좀 더 후기 같은 후기를 쓸 수 있을 것인데, 나는 그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나만의 방식으로 이 소설 《자기 앞의 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자기 앞의 생, ⓒ노지


 이 소설의 작가 이름으로 사용된 '에밀 아자르'이라는 이름은 작가 로맹 가리가 외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편견과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사용한 또 하나의 가명이다. 이미 인기 작가였던 그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의 소설을 평가받고 싶어 했다. 명성, 내 작품의 평가 기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내 얼굴, 그리고 책의 본질 사이의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런 시도를 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건 요즘 사람들에게 바보 같은 행동을 보일지도 모른다. 인기 베스트셀러 작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면, 이익은 보장되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데… 무명의 이름으로 새로 도전을 한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형식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기보다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살고 싶은 것이 바로 가슴 속의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리포터> 시리즈로 익히 알고 있는 '조앤. K. 롤링'도 <해리포터>로 굳어진 자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각도로 세간의 평가를 받고 싶어 가명으로 새로운 책을 낸 적이 있었다. 그 책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 저자가 '롤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었는데, 그만큼 작가의 이름이 책의 평가에 미치는 영향을 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로맹 가리는 그 모든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에밀 아자르'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오촌을 만들어 작품을 출간했고, 이 사실은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한참 후에 밝혀진다. 책 《자기 앞의 生》 마지막 부분에는 그가 이런 일을 한 이유에 대한 사연이 적힌 유서가 그대로 옮겨져 있으며, 옮긴 이의 추가적인 이야기도 읽어볼 수 있어 소설을 읽은 후에도 책은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로랭 가리, ⓒ구글 검색


 《자기 앞의 生》이라는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건 모모가 자신을 처음부터 돌봐준 로자 아줌마의 곁을 지키면서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랑하는 소중한 한 사람이 있다'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요즘 인기 있는 한국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사람에게 감동을 준 건 그 삶의 메시지가 잘 담겨 있기 때문인데, 이 소설도 그런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음,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소설이라는 것을 읽고 글을 쓸 때에는 '내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이라는 고민에 사로잡혀 글이 잘 풀어지지 않는다. 평소 내가 읽는 라이트 노벨 같은 장르는 책을 읽은 후에 즐거운 감정을 그대로 글로 옮기면 되지만, 이런 작품 같은 경우에는 '하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는 고민이 글을 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어떻게 이 책을 잘 평가해서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면서 책의 특정 부분에서 할 수 있었던 내 생각을 책에 메모한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책의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내가 그 부분에서 어떤 생각을 했으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게 바로 내가 쓸 수 있는 《자기 앞의 生》을 읽고 느끼고 생각한 이야기일 테니까.


 자, 그럼, 이제부터 《자기 앞의 生》에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 중 일부와 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제법 긴 글이 될 수 있기에 시간이 없다면, 그냥 스크롤바(PC 화면)를 내려주거나 스마트폰 터치로 화면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한번은 식료품점 앞에서 진열대 위의 달걀을 하나 훔쳤다. 주인은 여자였는데, 그녀가 나를 보았다. 나는 가게 주인이 여자인 곳에서 훔치기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내 엄마도 틀림없이 여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달걀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주인 여자가 나왔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잘 끌 수 잇도록 그녀가 내 뺨을 한 대 올려붙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곁에 쭈그리고 앉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이런 말까지 했다.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처음에 나는 그녀가 나를 구슬러서 달걀을 도로 찾으려고 그러는 줄 알고 호주머니 깊숙이 든 달걀을 더 꼭 쥐었다. 그녀는 벌로 나를 한 대 갈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서서 진열대로 가더니 달걀을 하나 더 집어서 내게 주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뽀뽀를 해주었다. 한순간 나는 희망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그때의 기분을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니 굳이 설명하진 않겠다. 나는 그날 오전 내내 그 가게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따금 그 맘씨 좋은 주인 여자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손에 달걀을 쥔 채 거기에 서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쯤이었고, 나는 내 생이 모두 거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p17-8)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한 건 바로 '교육의 방향과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아이를 생각하는 교육이 될 수 있는가'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의 결과만 바라보며 그들을 처벌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유를 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외면하게 되면… 문제를 바로 잡지 못한다.


 대게 많은 아이가 부모님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 자신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부모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을 저지르고는 한다. 그리고 아이가 '나는 관심도, 사랑도 받지 못해.' 하고 결정을 내렸을 때, 아이의 행동은 완전히 이전과 완전히 180도 바뀌면서 부모가 뒤늦게 바로 잡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한국에서도 그런 사례가 학교 폭력에 많지 않은가?


 일전에 소개한 <학교의 눈물>,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학교의 슬픔> 등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였다. 이런 문제는 한국 내에서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있는 모든 나라에서 비슷하게 이루어진다. 《자기 앞의 生》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여럿 읽을 수 있었는데, 조금 극단적인 결말까지 이야기하는 한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커서 경찰이 될지 테러리스트가 될지 아직 몰랐다. 그것은 나중에 커봐야 알 것이다. 아무튼 어떤 조직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사람을 죽이는 건 정말 싫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야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무장강도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사람들이 찾아내서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보살펴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떼지어 다니기도 하고 심지어 굶어 죽기도 한다. 로자 아줌마는 죽어가는 아이들이 수백만 명이나 되며, 그런 자신을 사진 찍게 하는 아이들까지 있다고 했다. 인류의 적은 바로 남자의 성기이며 가장 훌륭한 의사는 예수인데, 그 이유는 그가 남자의 성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그래서 그의 경우는 예외라나. 로자 아줌마는 인생이 무척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아직 아름다운 인생을 찾지 못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p141)


 이 작품이 출간된 시기가 1976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옛날의 이야기에서도 요즘과 똑같은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다. 결국,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는 예부터 중요했으며, 사람들이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방법에 따라 아이는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고, 삶을 착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월이 흘러도 이건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우리나라 한국에서는 한 고등학생이 백색 테러 사건을 일으키면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오직 색깔론으로 접근해서 결과만 보는 모습은 개선책이 될 수 없다. 정부가 색깔론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금 한국 정부를 뒤흔들고 있는 정윤회 사건과 문건 유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자기 앞의 생》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읽어볼 수 있었다.


나도 마찬자기였다. 그런 기분은 쉽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들처럼 다시 나란히 누워 편안하게 잠에 빠져 들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했던 말에 많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틀린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p44)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69)


한번은 검둥이가 그 길로 지나갔다.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애를 그냥 검둥이로 불렀는데, 아마도 그 동네의 다른 흑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 사람이 덮어써야 하는 건 언제나 있는 흔한 일이니까. (p229)


 이 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문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지만,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괜찮아, 내가 가진 돈과 권력이 어떻게 해줄 거야.' 하고 생각하기에 편히 잠들 수 있는 세상이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이니까. 문제를 고발한 사람은 자살하고, 문제를 지적당한 사람은 '찌라시' 운운하며 당당해 하고 있으니까.


 이전에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다 눈을 뜬 한 이등병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진 적이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이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분노했지만, 그 사건은 결국 흐지부지 흐르고 말았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재조사 과정에서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정의롭지 못한 자들은 편히 잠들었지만, 정의로운 자들은 어렵게 잠들며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참, 웃긴 일이다. (집단 폭행 혐의 없음으로 발표가 났다고 함.)


ⓒJTBC


ⓒJTBC


ⓒKBS1


 물론, 사람을 이렇게 오직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정의롭다, 정의롭지 못하다는 넘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삶을 사는 이유도 파고들어 보면, 어떤 특정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겉으로 보이기에 좋지 않은 행실을 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이 여린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책 《자기 앞의 생》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이다. 네 엄마에게는 가진 게 좀 있다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 좋은 집안 출신이거든. 자기가 하는 일을 자식인 네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눈물을 머금고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지. 그런 직업에 대한 편견으로 네가 깊은 상처를 안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야."

말을 마친 후 로자 아줌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츠 선생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창녀들에게는 마음의 눈이 있다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앗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p93)


 이 이야기는 사람은 절대 한 부분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검고 흰 감정이 섞여 있으며, 누구라도 화가 날 때가 있고, 누구라도 잘못할 때가 있으며, 누구라도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천적인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사람은 어떤 부분이 더 강해지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 사람의 인품과 모습, 삶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현아 전 부사장 같은 인물이 아닐까? 그녀는 분명히 그 부유한 집에서 좀 더 바르게 사람이 되어 올바른 기업 윤리를 가진 리더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탐욕에 물든 환경과 교육으로 인해 그녀는 결국 갑질을 하며 약자를 괴롭히는 최악의 경영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게 사람이다.


 나도 절대 내가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도 남모르게 잘못을 많이 했으며, 당연한 잘못을 하면서도 '누구나 다 그런데 뭘?'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이성이 양날의 칼이라고 생각한다. 한쪽 칼은 상대방의 잘못을 찌르지만, 한쪽 칼은 내 안일함을 찌르는 그런 칼 말이다. 하지만 내게 겨뤄진 날은 너무 무뎌서 잘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못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



 나는 책 《자기 앞의 生》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이 문학적으로 어땠으며,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는가… 그런 이야기를 나는 잘하지 못한다. 나는 책을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읽고, 언제나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서 '내 이야기'를 하는 독자이자 저자인 한 명의 소박한 블로거이니까. 결국, 이것도 검고 흰 부분을 가진 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젠가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는데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그저 내 곁에서 항상 있어준 사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힘들 때마다 응원해준 사람, 잘못을 하더라도 지그시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하구나.'하고 말을 해준 사람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앞의 생》은 그런 책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좀 더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책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개인의 몫이다. 많은 울림이 있는, 많은 시간의 여백이 있는 책 《자기 앞의 생》. 이야기가 끝이 나고, 책의 끝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 에밀 아자르와 옮긴 이의 이야기는 마지막에도 더 읽는 재미를 더해줄 것이다.


 여기서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쓰는 감상 후기를 마친다. 이 글의 마지막까지 읽어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혹시 마음에 들었다면, 아래에서 '공감' 버튼을 눌러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소중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기를!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4)

  • 2014.12.21 21:07 신고

    잠시 세상 일을 덮어두고 책에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올해는 왜이리 추운지, 아무리 따뜻한 옷을 입고 있어도 춥네요.

    • 2014.12.21 21:59 신고

      그러게요.
      마음이 점점 얼어가는 세상이라 그런 것 같아요 ㅠ

  • 2014.12.22 13:44 신고

    저는 굉장히 슬픈 소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가치로 기쁘고 충만했던 소설이었고요.

    내가 몹시 슬퍼하는 것을 보고 로자 아줌마는 가족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나무에 묶어두고 바캉스를 떠나는 가족들도 많고, 해마다 그런 식으로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죽어가는 개가 삼천마리씩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그녀에게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라고 몇 번이고 맹세했다.

    아줌마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그녀가 못생겼다는 생각마저 잠시 잊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녀의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냉정하다고들 했지만, 세상에 그녀를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혼자 육십 오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견디어왔으니 때로는 그녀를 용서해줘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로자 아줌마가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에 사람들이 안락사를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 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열 네 살인데, 왜 열 살이라고 하셨냐구요."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로 그녀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네가 내 곁은 떠날 까봐 겁이 났단다, 모모야. 그래서 네 나이를 좀 줄였어. 너는 언제나 내 귀여운 아이였단다. 다른 애는 그렇게 사랑해 본적이 없었어. 그런데 네 나이를 세다 보니 겁이 났어.네가 그렇게 너무 빨리 큰애가 되는 게 싫었던 거야."

    개인적인 한 소년의 성장으로만 생각했고 몇 번을 읽어도 그 프레임에 순응해서(크게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한 철저히 문학적으로 몰두했는데 노지님은 인삿말처럼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소설을 읽으셨네요.

    • 2014.12.22 20:49 신고

      그 부분을 읽으면서 저도 정말 슬프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 부분을 읽으면서도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뭐, 결국 소설은 읽는 사람마다 보는 게 다르니까요 ㅎ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