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할머니와 20대 도시녀가 함께 시골에서 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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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독서 모임을 운영하는 지인의 추천으로 응24 북클립에 가입해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라는 소설을 조금씩 읽고 있다. 이 소설은 제목에서 ‘시체’라는 단어가 등장해서 처음에는 혹시미스터리 작품이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아주 정겨운 말투가 반겨주는 시골 생활 소설이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21살의 도시에서 생활하던 여성 강무순이 시골에서 홀로 살게 된 친할머니 홍간난과 함께 살게 된다. 주인공이 일부러 도시에서 시골까지 제 발로 걸어온 건아니고, 일종의 유배 생활에 가까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서 할머니를 돌볼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다.


 그런데 왜 하필 주인공이 선택이 되었는가, 그건 주인공의 평소 행실 때문이었다. 그녀는 삼수생이 되어 수험 공부를 해야 했지만, 도시에서는 뭣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매일 같이 아침 드라마, 평일 드라마, 주말 드라마,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보면서 공부하는 시간이 턱 없이 부족했다.


 어차피 시험 핑계 삼아 빈둥빈둥 놀기 때문에 그녀를 부모님이 할머니 댁에 보내게 된 거다. 할머니가 살아도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거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개 월 동안 적적할 수 있기 때문에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뭐, 뜻은 거창해도 일종의 벌칙에 가까운 그런 명령이었다.



 주인공은 도시에서 생활하던 대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시골과 전혀 다른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할머니에게 매일 아침 잔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뜬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할머니가 손녀 주인공을 나무라는 장면이 얼마나 딱 시골 할머니 같은지 몰라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만약 지금 살아계신 우리 외할머니가 기력이 쇠하지 않으셨다면 딱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치매 증상을 앓으시는 탓에 곧잘 헛소리를 하면서 지내고 계시지만, 그래도 고집 하나는 여전한 데다가 힘도 있어서 어머니와 이모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나서서 밭에서 깻잎을 따곤 하신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라는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홍간난 할머니도 그렇다. 홍간난 할머니는 치매는 아니지만 역시 시골 할머니답게 지나치게 부지런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신다. 이런 할머니와 달리 주인공은 매일 같이 빈둥거리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마찰을 겪으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불평도 하고, 웃기도 하고, 시골에서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정취를 감상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 도시와 너무나 다른 시골의 여러 기준이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그중 한 장면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개는 왜 끌구 다닌다?”

그날 저녁, 밭에서 들어온 홍간난 여사가 발 씻으며,

“말만 한 처녀가 개 끌고 다닌다고 미친년인 게라고 소문 났더라.”

이거 원, 문화적 차이가 거의 파리지앵과 아프리카 마사이족만큼이다. 그러니 오늘 또 개 끌고 산책 나갓다가는 신고들어갈지도 모른다.

아는 사람은 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시간은 한없이 더디간다. 그 얘기는 뭐든 하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인데....(본문 21)


알려나 모르겠다. 공영방송은 새벽 2시 넘으면 끝난다. 36개 채널이 24시간 내내 편안하게 돌아가는 문명의 땅에 살 땐 그런 거 몰랐다. 오늘은 다큐멘터리 <공교육 이대로 좋은가>의 마지막 방송이었는데,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얼마든지 봐줄 테니까 제발 끝나지만 말아라 했는데 결국 끝나고 말았다. 무지개 색깔의 화면 조정 시간이 끝나면 샌드존이 나올 것이다. 꺼진 TV모니터에 우울한 얼굴이 비친다. 그 얼굴은 나다. 아아! 나의 tvN! 나의 Mtv! 나의 하나tv여! (본문 29)


 저자의 묘사를 따라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괜스레 웃음이 지어진다. 어릴 적에 살았던 시골의 풍경이 떠오르기도 하고, 지금도 해마다 3-4번은 방문하는 밀양의 한 시골 마을에 계신 외할머니가 떠오르기도 한다. 덕분에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를 재미있게 읽기 시작할 수 있었다.


 아직 40페이지 남짓 읽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이 더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마지막에는 홍간난 할머니와 21살 도시녀 강무순이 어쩌면 제목에 적힌 ‘시체’라는 말이 언급되는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헤어질지도 모르겠다. 책 첫머리에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었던 할머니에게’ 적혀 있었으니 그런 걸까?


 결말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요건은 있다. 잠시나마 일주일에 2-3번 정도 전자책을 통해 천천히 읽을 생각인 소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이제 여름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는 시기에 시골을 무대로 한 소박한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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