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인문학 수업이라 쓰고 성인 인문학 수업으로 읽는다

반응형

 최근 뜨겁게 사랑을 받다 종영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보면 동화를 통해 위로를 받는 성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화는 한껏 어릴 때나 읽는 문학 작품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다시 어릴 적의 동화를 읽으면 어릴 때 미처 몰랐던 것을 발견하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최근에는 성인을 위한 동화가 많이 발매되고, 성인이 모여서 함께 하는 동화 읽기 모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동화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어릴 적에 보았던 우리에게 꿈과 사랑을 이야기한 만화와 애니메이션도 성인이 된 우리에게 감동과 위로를 주며 주목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우리는 나이를 먹어서 성인이 되었어도 늘 어린 아이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금 더 일찍 우리가 자신의 삶과 문학을 연결하지 못해서 너무나도 건조하게 살아온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동화와 만화와 애니메이션 모두 문학의 연장선이니까.


 결국, 어떤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이 몇 살 때부터 몇 살까지만 접해야 한다는 연령 제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꼭 어려운 것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청소년이라고 해서 꼭 쉬운 것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읽고 싶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이번에 만난 <청소년 인문학 수업>이라는책도 그랬다. 이 책의 제목과 의도는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수업이지만, 그 예상 독자 범위에는 성인도 확대 독자로 들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인문학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이 읽기 좋은 콘텐츠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라는 건 단순히 어렵게 생각하고 꼬인 글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의 중심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해나가는 학문이다. 단순히 학교에서 배우는 주입식 교육과 암기, 문제 풀이를 통해 좋은 성적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과 다른 학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좋은 성적만 받으면 된다는 판단이 만연하다. 며칠 동안 환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한 파업을 벌인 의사들과 의사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사적인 욕심과 기득권을 위해서 시민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없는 행동을 일삼았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건 바로 성찰과 공감이었다. 단순히 자기네 집단에서 이득이 되기 위한 행동만 취하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상태에서 제3자의 이득을 위해 편집한 부분만 철썩같이 믿고 따라간 행동이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파업을 벌이고 말았다.


 결국에는 아무 생각 없이 주입식 교육에 따라 암기만 하고 생각 없이 따라만 가는 행동의 결과 그들은 지금 시험조차 치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니 또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위쪽이 잘못했잖아!”라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조차 지지 않으면서 명분을 잃은 아집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인문학에서 다루는 ‘질문과 삶의 성찰’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다. 단순히 누군가의 의견에 휘둘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부. 그게 바로 인문학이 지니고 있는 궁극적인 의의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만난 책 <청소년 인문학 수업>의 들어가는 글에서는 ‘인문학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른 이들과의 관계 형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내 일상과 별개의 학문이아니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학문과 삶의 접점으로 나아간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늘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인문학이 꼭 어려울 필요는 없다. 학교 교과 과정에서는 단순히 어떤 사건이 몇 년도에 벌어졌다는 것을 외우기만 했다면, 인문학은 ‘왜 그렇게 했을까?’,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나?’ 같은 질문을 통해 깊이 생각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인문학 강의는 늘 교수와 학생들의 질문과 의견 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시험 또한 외운 것을 달달 적어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말끔히 정리할 수 있는지 평가한다. 나는 이러한 방식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인문학 수업>은 제일 처음 르네상스 미술로 시작해서 천문, 지리, 글쓰기, 클래식 등 다양한 분야를 다르고 있다. 각 장의 첫 시작 부분은 ‘왜 알아야 할까?’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필요성을크게 가지지 못한 분야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 이후 ‘아, 그렇구나.’라며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교과서를 통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사람들의 이름, 사건, 작품 등을 통해 그곳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지 읽으면서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아마 어떤 분야에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흥미를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놀랄지도 모른다.




 내가 개인적으로 <청소년 인문학 수업>에서 관심을 두고 읽은 부분은 글쓰기다. 왜냐하면, 평소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글을 쓰고 있고, 유튜브를 통해 또 다른 형태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콘텐츠로 발행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글쓰기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쓰기 분야를 담당한 저자는 ‘글쓰기는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알아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글쓰기를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글쓰기 하나에 좀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 가진 힘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목적은 단순히 어떤 지식을 암기 위해서 빽빽하게 흰 종이를 채워나가는 것이 아닌,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형태로 혹은 누군가와 공감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공감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책을 읽으면 이런 글이 있다,


많이 읽으라고 했지만 많은 양의 책을 읽기보다 많은 시간 동안 읽으라는 뜻이다. 가능하면 좋은 책을 정독하자. 한 장 한 장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새기며 책과 대화를 나눠 작가가 전하고자 한 모든 것을 꿰뚫어야 한다. 마음에 드는 문장은 두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해보면 알겠지만 그때마다 감상이 다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가 싶게 새삼스러운 내용이 많다. 내 경험으로는 이런 사람들이 대체로 말을 잘하고 생각도 깊다. (본문 157)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건 단순히 권 수를 늘려가는 게 아니라 책을 오랫동안 읽는 데에 궁극적인 의의가 있다. 똑같은 책이라도 다른 시간과 다른 환경에서 읽으면 마치 새로운 책처럼 읽어볼 수 있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읽은 동화에 공감하고 위로를 얻는 것도 다시 읽은 책이 준 선물이다.


 인문학은 바로 그러한 책 읽기의 출발점이자 연장선에 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다시 생각해보고, 다시 질문하고, 다시 하나의 결론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이 인문학은 굳이 어려운 책으로 벽을 만들어 갈 필요가 없다.


 오늘 소개한 <청소년 인문학 수업> 같은 책으로 성인과 청소년 누구나 쉽게 글을 이해하고 쉽게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책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한 책은 대체로 우리가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질문을 던지면서 능동적인 책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진짜 책 읽기이자 인문학이 아니겠는가.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청소년 인문학 수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나서 다음에는 스스로 다양한 책을 찾아서 읽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카시오페아 출판사에서 발매된 <아트 인문학 여행> 시리즈를 추천하고 싶다. 무척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볼 수 있다.


반응형
그리드형(광고전용)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