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콘텐츠에 빠진 한국 사회
- 시사/사회와 정치
- 2019. 8. 27. 10:31
한국에서 ‘혐오’라는 건 기피되는 대상이 아니라 아주 유용한 대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혐오’를 소재로 유튜브 영상을 올리면 상당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혐오 콘텐츠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장르와 소재에 따라서 혐오의 범위나 정도가 상당히 달라진다.
대표적인 예로, 정치와 페미니즘 등 무조건 한쪽을 향한 일방적인 혐오가 강할수록 큰 인기를 끄는 소재들이 있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한국 콜마와 관련된 사건도 그렇고, 지금 논란이 되는 법무부 장관 조국에 대한 사건이 그렇다. 이 모든 사건은 서로 다른 한쪽에 대한 혐오의 농도가 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어느 한쪽으로 ‘의혹’을 부풀려서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듣고 싶어 하는 혐오를 부추기면 그 소수 집단에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오늘날 한국에서 혐오 콘텐츠가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혐오 콘텐츠가 인기 콘텐츠로 올라설 수 있는 이유다.
정치와 페미니즘 등 조금 무거운 혐오가 아니라 가벼운 혐오의 예로는 일순 큰 인기를 끌었던 ‘소련 여자’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예로 들 수 있다.
‘소련 여자’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러시아 여성은 한국 사람들의 호날두에 대한 혐오를 이용해 인기몰이를 했다. 호날두 유니폼을 태우는 영상으로 일순 주목을 받았고, 최근에는 호날두의 인형을 발로 차서 부러뜨리는 영상으로 또 주목을 받았다. 간단명료한 구성이 아주 좋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크고 작은 혐오 영상에 많은 반응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고상한 척을 하느라 하지 못하는 비난을 누군가 대신 나서서 속 시원하게 까주기 때문이다. 그 까는 행동에는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앞서 일단 누군가를 씹고 싶은 욕구 충족이 가장 우선이 된다.
누군가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함께 욕하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기 때문에 혐오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들은 제법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모두가 옳다고 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의견이 아니라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며 재미를 주는 사람을 향해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흔한 일이다.
일전에 내가 유튜브 채널에 올렸던 일본 여성을 폭행한 홍대 남성 사건 영상에 달린 댓글만 보아도 그렇다. 해당 영상은 나도 어느 정도 그런 혐오 콘텐츠를 올리면, 사람들이 볼 거라 생각했기에 올린 영상이다. 트위터를 보면 어느 정도 진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도 사람들은 거기서도 편이 나누어졌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의혹을 부풀려서 서로 갑론을박을 하며 부딪혔고, 진실을 보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을 보면서 자신의 혐오가 누군가를 부당하게 욕하는 게 아니라 아주 정당하게 합리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고 포장하려고 애썼다. 혐오 콘텐츠는 그런 교묘한 포장을 잘 이용한다.
그리고 해당 영상 댓글에서 사람들이 주고받은 그 혐오라는 감정은 일본 여성 폭행 사건과 관련되어 노출될 뿐만 아니라, 해당 영상을 올렸던 나에게 향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이 씹기 좋은 ‘발음이 안 좋다.’라는 결점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도 솔직히 썩 좋지 않은 발음이라 처음에는 목소리 없이 자막만 넣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내가 과거에 겪은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훈련으로 여기면서 목소리를 넣어서 아래 영상을 올렸다.
아마 위 영상에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어보면 ‘어… 좀 그렇다.’라는 반응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솔직히 인정한다. 내가 들어도 처음 내 목소리와 어눌한 발음은 ‘이게 뭐야…!’라며 부끄러워 하기도 했고, 앞으로 자신 있게 내어놓을 수 있는 결과물이 되지 못해 부끄럽기도 했다.
어릴 적에 내가 지독하게 몇 년 동안 학교 폭력을 당했던 것도 결국은 그렇게 스스로 자신 있게 대처할 수 없는 누구나 다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결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은 늘 집단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특히, 한국처럼 집단주의가 강한 곳에서는 그런 경향이 짙다.
특히 한국처럼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딪칠 수 있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야 결속이 강해지고,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위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은 어느 집단이나 혐오라는 감정을 부딪칠 수 있는 적을 만든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유지되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은 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상당히 인색한 나라였기 때문에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서 더욱 감정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편이다. 당연히 그 감정은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SNS와 유튜브로 퍼지는 중이다.
오늘 당신은 얼마나 혐오와 관련된 콘텐츠를 보았는가? 또 거기에 얼마나 열심히 반응하여 부정적인 댓글을 달았는가?
이건 당신이 우측이든, 좌측인지 관계없이 일어나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일탈에 가까운 욕구 충족에 해당한다. 그러한 이유로 한국 사회에서는 혐오 콘텐츠는 늘 화제의 중심에 있고, 크고 작은 혐오는 인기를 저절로 끌게 되고, 한국은 점차 혐오에 홀릴 수밖에 없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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