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아주 평범하지만 매력적인 에세이
- 문화/독서와 기록
- 2017. 4. 21. 07:30
하염없이 '바쁘다', '~해야 한다'는 강박에 얽매인 당신을 위한 책
지난 며칠 동안 대학에서 치를 세 번째 중간고사를 위해서 평소 하지 않던 공부를 하며 보냈다. 어떤 사람은 공부가 가장 쉽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무턱대고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야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는 나는 세 번째 중간고사를 위한 공부가 너무 재미없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나는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갈 수도 있구나!'라는 걸 체감했다. 평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은 항상 부족해서 '다른 사람이 노는 시간을 내가 빌리고 싶을 정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험공부를 하면서 집에서 강의 내용을 곱씹어 보면 시간이 괜히 더 느리게 흘러갔다.
아마 이것은 나의 감각이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보는 데에 질러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방 안에서 혼자 공부하는 동안 시간의 적막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수시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보냈다. SNS를 본 시간은 공부를 한 시간과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시험 기간에 책을 읽게 되면, 공부는 내팽개치고 오로지 책만 읽게 되어 나는 되도록 책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4월 19일은 오로지 집에서 공부만 할 수 없었기에 전날에 도착한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읽었다. 도무지 수업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외우는 단순 노동만 할 수 없었다.
이기주 작기의 <언어의 온도>는 아주 평범한 에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에세이는 제법 긴 내용의 수필을 떠올리기 쉬운데, <언어의 온도>는 아주 짤막하게 작가가 듣거나 읽은 주변 풍경을 작은 책에 작은 폰트로 옮겨 놓은 책이다. 아주 대단한 내용도 아닌, 너무나 평범한 내용을 말이다.
하지만 평범하다고 해서 책을 읽는 동안 '뭐야, 괜히 인터넷 서점 추천 목록에 떠서 샀네.'라는 후회는 하지 않는다. 대학 강의 내용을 반복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쓰느라 지친 상태에서 책을 읽어도 책을 덮고 싶지 않은 욕심을 품게 했다. 그 짤막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적막한 시간을 다채롭게 채워줬다.
짧은 이야기 중에서도 더 짧은 이야기 한 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오래전 기억이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직장 동료가 회사 앞 화단에 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쁜데. 우리 조금만 꺾어 갈까?"
그가 꽃을 낚아채려는 순간 경비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아니, 뭣들 하는 건가? 꽃을 왜 꺾어?"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한 송이만 꺾어 갈게요."
"그냥 지나가며 보도록 하게."
"네? 왜요?"
"이 꽃은, 여기 이 화단에 피어 있어서 예쁜 건지도 몰라. 주변 풍경이 없다면 꽃의 아름다움이 반감될 걸세. 그러니 꺾지 말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꽃은 지금 보는 꽃과 다를 거야." (본문 49)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으로 또렷이 그려졌다. 이 짧은 이야기 하나가 참 많은 걸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늘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우스꽝스럽게도 막상 손에 넣으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게 또 사람의 욕심이다.
19일에 내가 열심히 공부한 이유도 좋은 성적을 얻고 싶은 욕심이다. 그런데 굳이 내가 그렇게 성적에 열을 올릴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처럼 모든 과목에서 'A+' 를 받아 장학금을 타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취업을 염려하여 좋은 학점을 스펙으로 만들어 놓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도 없었다.
그냥 모두가 시험을 맞아 공부하는 건 당연하니까 공부를 했다. 그래서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공부가 너무나 재미가 없었던 게 아닐까. 마치 화단에 피어 있어서 예쁜 꽃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꽃의 아름다움이 다른 것처럼, 책상 앞에서 책을 읽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은 가치가 너무 달랐다.
<언어의 온도>는 이렇게 책을 읽다가 무심코 '나는 지금 어떻지?'라고 물으며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책을 읽으면서 단 한 문장의 언어는, 아니, 단 한 단어의 언어라도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좋은 글은 무조건 긴 글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 공감할 수 있는 글이다.
처음 <언어의 온도>를 집었을 때는 20일에 치를 '일본 문학의 이해'와 '서양의 역사로부터 배우는 법' 시험공부에 지쳐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지금 글을 쓰면 제법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래서 19일 오후 4시에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런데 여기까지 글을 쓰고 보니 썩 좋은 글은 아닌 것 같다.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짤막하게 소개하기 위한 글이 '시험 공부가 재미없다.'라는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역시 나는 시험공부보다 책 읽기가 즐겁다.'라는 개인적인 감상으로 마무리되어버렸다. 이렇게 우습고 부족한 서평을 적을 줄이야.
글을 확 지우려다가 그래도 그냥 발행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어느 곳에 기고할 전문적인 글도 아니고, 그냥 책과 사는 이야기를 적는 내 블로그에 발행할 글이니까. 짧게 읽은 <언어의 언도>는 시험공부를 위해 책을 덮는 게 아니라, 책을 읽기 위해 잠시 책을 덮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기말고사를 향해 또 무섭게 시간을 흘러갈 것이다. 대학가에서 보내는 일상이 이러한데, 사회 전방에 있는 직장인과 절벽 끝에 있음을 실감하는 취준생, 5월 장미 대선을 앞둔 대선 후보와 각 인물이 보내는 시간은 쉽게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는 한 손으로 들고 읽기 쉬운 크기의 책이다. 모두가 바쁜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내 마음을 위한 시간을 짧게 가져보는 건 어떨까. 시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돌린 나처럼, 오늘도 '바쁘다'를 연신 외치는 당신 또한 찾아 헤매던 휴식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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