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잠시 멈춤이 필요하다
- 문화/독서와 기록
- 2017. 4. 29. 07:30
공백과 여행의 과정은 우리가 스스로 멈추는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하루에 적어도 한두 번은 마음에 드는 글을 만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이미 블로그에 서평을 작성해 올렸음에도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은 인상적인 글을 읽으면 참 난감하다. 다시 서평을 한 개 더 쓰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글만 블로그에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글을 만나면 항상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편이다. 이렇게 하나둘 인스타그램에 올리다 보면 최근 올린 사진이 책 일부분일 때가 많다. 혹시 저작권 침해로 고소를 당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지만, 한번 읽고 글을 썼다고 해서 책을 덮는 일은 아무쪼록 아쉬운 일이다.
생각보다 일찍 잠이 깬 오늘은 아침부터 <언어의 온도>를 집어 들고 읽었다. 약 60% 정도를 읽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겨 블로그에 후기를 발행했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아침이나 밤에 짬짬이 시간을 내어 <언어의 온도>를 읽고 있다. 오늘도 다시 한번 더 소개하고 싶은 글을 만났다.
아래의 글은 바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글이다.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본문 248)
공백. 다른 말로 하자면 휴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래전에 베스트셀러가 된 혜민 스님의 <때때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혜민 스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언제나 쉼표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수 없다. 긴 글에서도 쉼표가 없는 글은 호흡 조절이 어려운 법이다.
우리는 모두 적당한 공백이 필요하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는 공백을 가지는 일을 불편해한다. 워낙 놀면 안 된다는 편견이 어릴 때부터 강하게 자리 잡은 탓인지, 지금 무엇을 하지 않고 놀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냥 불안하다. 혹시 당신도 그랬던 적이 없는가?
지난 일요일(23일)에 방송된 <김제동의 톡 투유>에서는 '놀기'가 주제였다. 사람들이 노는 것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방송을 보면서 '못 노는 사람이 아니라 노는 걸 억압받아 놀 줄 모르게 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살짝 놀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20대라면 누구나 한번은 가본다고 하는 클럽에 나는 발을 들인 적은커녕, 클럽 간판을 향해 고개를 돌린 적도 없다. 원래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사람들이 모여 소란스러운 곳에 발을 옮기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괴롭히는 일이니까.
그러한 놀기를 하지 않는 대신 나는 늘 책을 읽는다. 이렇게 아침에 책을 읽다가 짧은 글 한 편을 쓰게 되는 일은 '어떤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그냥 책을 읽다가 우연히 벌어진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을 때, 더 좋은 글이 머릿속에써 떠올랐던 것 같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가끔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지워버리고, 온전히 하고 싶은 일을 즐기는 일이다. 직장인은 야근과 회식, 학생은 숙제와 공부로 항상 할 일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못 노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놀 줄 모르게 된 것이 아닐까?
어릴 적의 나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 어디든 부담스러워 항상 책을 들고 다녔다. 친척끼리 모이는 곳에서도 항상 책을 챙겨가 한구석에서 책만 읽었다. 누군가는 참 사교성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불편함을 느끼며 친한 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장소에서 나는 혼자만의 멈춤이 너무나 필요했다.
그런데 책을 계속 읽다 보니 "항상 책만 본다. 나중에 대통령이라도 되려고 하느냐?"이라는 비아냥이 곳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친척들은 그런 뜻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나는 그러한 장소에서 책을 읽는 일이 무척 부담스러워졌다. 한국은 언제나 그랬다. 함께 하지 않으면 늘 고된 편견에 시달렸다.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취미 생활을 홀로 즐기지 못하는 한국 사람. 그 이유에는 역시 주변 사람의 편견 어린 시선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놀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도 마치 여행을 통해 내가 놀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을 쉬지 않고 찍는 일은 진짜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공백에 대한 이야기 이후 이어진 <언어의 온도>의 이야기는 여행이었다.
여행.
가슴에 불을 지피는 단어다. 일상의 버거움 때문에 자주 시도하지 못할 뿐이다.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에 가는 행위를 일컫는다.
하지만 이 정도 설명으로는 여행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럴 때는 단어와 문장의 수집가로 불리기도 하는 소설가와 시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봄 직하다.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투)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 (폴 발레리)
밑줄 그을 만한 문장들이다.이들의 이야기처럼, 우린 목적지에 닿을 때보다 지나치는 길목에서 더 소중한 것을 얻곤 한다.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장거리 이동을 할 때 비행기보다는 열차에 몸을 싣는 편이다. 기차를 타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찬찬히 응시할 수 있다. 이동의 과정을 음미하면서 멀어지는 것과 가까워지는 것을, 길과 산과 들판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어디 여행뿐이랴. 인간의 감정이 그렇고 관계가 그런 듯하다. 돌이켜보면 날 누군가에게 데려간 것도, 언제나 도착이 아닌 과정이었다. 스침과 흩어짐이 날 그 사람에게 안내했던 것 같다. (본문 250)
여행의 정답을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행의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마냥 일의 연장선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공백의 시간 동안 우리는 정말 휴식을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휴식을 또 다른 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바삐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오늘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는 방법은 쉬지 않는 게 아니다. 적절히 쉬면서 내가 과정을 더 즐길 수 있도록, 내가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오늘 아침 책을 읽다가 글을 쓰는 일이 나에게 그러하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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