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를 만드는 선생님 아래에서 차별을 배우는 아이들
- 시사/사회와 정치
- 2015. 7. 24. 07:30
존중과 배려를 배우지 않고, 그냥 공부를 잘했던 선생님 아래에서 무엇을 배우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생님을 무시하거나 괴롭히는 청소년의 사연이 많이 보도되었는데, 이제는 좀 더 악랄하게 자신의 학생을 다루는 선생님의 사연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뭐, 사람들이 가지는 관심의 방향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좀 더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다.
애초에 '비밀'이라는 단어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아'라고 지적받던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이제 사회에 진출한 '문제 사회인'이 되었을 뿐이니까. 제 잘못을 똑바로 수정하지 못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각 분야에 진출한다고 해서 그 본질이 바뀔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어떤 사람은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많은 사람이 청소년 시기에 했던 차별을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이 반복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성인 남자가 가는 군대에서 학교 폭력 이상의 집단 구타를 비롯한 갖가지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문제아'가 '문제 어른'이 되었으니까.
ⓒSBS
게다가 군대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제대로 처벌을 받는 일이 많지 않다. 윤 일병 사건과 제2 윤 일병 사건처럼 언론에 보도되어 대중의 큰 관심을 받는 사건은 조사하는 척 처벌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건은 그냥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이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군대처럼 폐쇄적인 특징을 가진 집단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군대' 같은 폐쇄적인 집단이 아니라 평범한 직장 생활 내에서도 10대 청소년 사이에서 번졌던 '은따(은근히 따돌리는 것)'를 비롯한 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드러나는 문제는 자질이 부족한 선생님이 학교에서 일으키는 문제다. 일전에, 제주도에서 한 교사가 숙제하지 않은 벌로 1일 왕따 제도를 시행하여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던 일이 보도되면서 큰 비난을 받았었다. 이런 일에는 어떤 변명도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1
나는 단순히 가혹한 체벌을 한 선생님보다 이렇게 차별을 유도한 '못난 선생님'은 좀 더 강한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런 선생님은 직접적 가혹한 체벌 이상으로 아이들이 직접 손을 대서 자기들끼리 폭력을 만들도록 한 최악의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최근 빠르게 증가한 다문화 가정의 아이 중 약 37%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한다. 아직 다문화 가정의 아이를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몇 문제를 살펴보면 왕따를 조장한 선생님의 생각 없는 인종 차별 발언이 아이들 사이에서 왕따의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3
'공부만 잘하면 된다, 좋은 대학교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면 된다.'라면서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평등을 가르치지 않았으니, 공부를 잘해서 교사가 된다고 해도 올바른 교사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이름표만 '선생님'일 뿐인 '못난 사람'일 뿐이다. 그것도 최저 최악의.
어떤 사람은 내가 한 사람의 평가를 너무 극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일가견이 있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 현장을 조금만 살펴보면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이유 하나로 잘못을 용서받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잘못을 지적받으면 다행이지만, 그마저도 없다.
왜냐하면, 공부 잘하는 내 아이(학생)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와 학원에서도 자랑할 수 있고, 가정 내에서도 부모님이 콧대를 세우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트로피이기 때문이다. 그 트로피에 조그마한 흠집을 내는 일을 어른이 사전에 막으면서 잘못을 깨닫고 반성할 기회도 없어졌다.
|
이런 사회에서 단순히 공부를 잘해서 임용 고시를 통과한 사람 중 가짜 모범생이 정말 좋은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일은 어렵다. 왕따와 차별을 교실에 만드는 선생님이 아니라 평범하게 자신의 맡은 업무라도 성실히 수행하는 선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야 할 수준이다.
한 마리의 더러운 고기가 물가를 흐리는 것처럼, 한 명의 질 나쁜 선생님이 학교를 흐릴 수 있다. 존중과 배려와 평등을 배우지 못한 아이가 단순히 공부하는 기계로 능력이 뛰어나 선생님이 되고, 중요한 요직에 진출하더라도 그 사람의 본질이 선하기를 기대하는 건 오만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몇 년 전에 보았던 무서운 청소년이 이제는 무서운 선생님, 무서운 선임, 무서운 선배로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더 무서워진 요즘 청소년은 과연 앞으로 또 어떤 더 무서운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까? 모두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적지 않은 그 확률이 두렵다.
*그럼에도, 힘든 환경 속에서 언제나 아이들을 차별 없이 진정한 의미의 교육을 위해 애쓰는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글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