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라'고 말하지만, 실패를 받아주지 않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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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실수를 통해서 '다음에는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할 수 있는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고, 실수를 통해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공감을 얻기도 한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 생물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이라는 말이 괜히 명언으로 남지 않았다. 그런데 '실패'와 '실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때때로 '실수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수와 실패의 차이는 과정과 결과 둘 중에서 어느 곳에 문제가 있는지에 따라 나누어진다.


 상황 판단을 잘못하거나 경험 부족으로 발생한 과정의 문제를 우리는 '실수'라고 말하고, 어떤 행동을 통해 도달한 최종 결과가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실패'라고 말한다. 실수를 줄여가는 과정을 통해서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머릿속으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우지 못할 때가 자주 발생한다.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지 못한 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버리기 때문이다. 아마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한 일을 돌이켜 보면 벌써 간단한 실수가 눈에 띌 것이다.


'왜 그런 멍청한 짓을!', ⓒ만화가랑 어시스턴트랑


 최근에 내가 한 실수는 또 치킨을 시켜 먹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일주일에 한 번 먹기로 한 치킨이지만,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보면서 입이 심심해서 치킨을 기어코 시켜 먹고 말았다. 과거, '야구를 그냥 보더라도 치킨은 먹지 말자' 하고 다짐했음에도 또 잘못을 되풀이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요즘 젊은 세대의 말로 '노답(답이 없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저녁에 또 치킨을 시켜 먹으면서 치킨을 맛보는 만족도보다 이후 몸무게가 다시 늘어난 것을 보는 절망감이 더 큰 경우를 가리켜 우리는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기에 '실패'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치킨을 먹고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것보다 좀 더 복잡한 변수를 가진 많은 일이 있다. 대학을 가서 취업해야 하는가, 아니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바로 취업해야 하는가… 두 개의 선택지를 고르는 일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


 어른들이 말하길, '대학은 꼭 가야 한다. 통계를 보더라도 대졸자의 임금이 고졸자의 임금보다 더 높다.'라고 한다. 분명히 중견 기업 이상의 기업에는 '4년제 대학 졸업증'이 응시 자격으로 있을 정도이니 대졸자의 평균 임금이 높은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자본력의 규모가 큰 곳에 가니 임금이 높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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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목적이 과연 성공인가, ⓒ비정상회담


 그런데 방향을 조금 돌려서 생각해보자. 4년제 대학 졸업장을 가진 사람 중 그런 기업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과연 평균 몇 명이 될까? 우리나라에서 불굴의 대기업으로 유명한 삼성 입사 시험은 수능 시험과 종종 비교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응하면서 대학생이 치르는 제2의 수능 시험이 되어버렸다.


 또한, 많은 대학생이 '안정적인 노동'을 원하면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 고시 공부를 하는 데에 청춘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현상이 나온 이유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수'와 '실패'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선택지라고 잠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년들의 창업을 권유해서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창조 경제를 말했지만, 한국에서 무턱대고 창업을 해서 성공하는 일은 4년제 대학 졸업증을 가지고 삼성에 입사하는 일만큼 그 확률이 희박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문제는 이렇게 창업을 권하더라도 막상 창업이 실패하였을 때,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제도가 없다는 점에 있다. 실수를 통해 성장하라고 말하지만, 실수를 통해 실패에 이르게 되면 우리 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여 주는 게 아니라 '낙오자'로 낙인을 찍으면서 빚과 함께 벼랑 끝으로 내몰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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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게 키우는 것, ⓒ비정상회담


 그러니 어찌 대학생이 조금이라도 더 실패 확률이 적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고시 시험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사후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중견 기업 이상의 기업에 입사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라도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미래가 안정적인 일을 선택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도 "행정고시 공부해서 공무원이나 해라."고 잔소리를 하시는 어머니의 생각도 분명히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전업 블로그'라는 수익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을 선택해서 꿈이라고 말하는 나를 보는 어머니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은 실패에 관용적이지 않으니까.


 지난 <김제동의 톡 투유>에서는 '실수'를 주제로 하여 이야기를 했는데, 실수의 필요성과 실수에 필요한 사회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김제동은 "'작은 실수'는 큰 실수를 막는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고 말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일'. 이 일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서 만들어야 하는 제도인데, 이런 제도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과 정치인이 필요하다. 정치가 잘 되어야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시도해볼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은 실수를 통해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난다. 비록 오늘 내가 실수를 했더라도 내일은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우리는 더 나은 자신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작은 실수를 쉽게 눈감아주지 못한다. 아니, 실수를 눈감아주는 게 잘못일 수도 있다. 잘못했으면, 그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훈계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실수를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그 사람을 낙오자, 패배자, 실패자 등으로 낙인 찍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학력 지상주의 풍조가 강하게 물들어 있는 우리 학교에서는 솔직히 이런 모습이 없어지기가 어렵다. '질문하세요.'이라고 말하면 손을 번쩍 들고 과감히 질문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자칫 실수를 해서 창피를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는 발전의 가능성이 없다.


 지난 주 <김제동의 톡 투유>에서 지적 장애 딸을 가진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누군가를 칭찬하면 박수를 쳐주는 세상이었는데, 요즘은 누군가를 공격하면 환호성을 지르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이라는 말씀이 가슴에 남아 크게 울렸던 이유는 어릴 적에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일까?


 실수와 실패를 한 사람을 향한 공격을 멈출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 실수를 통해 성장 가능한 사회와 학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실수와 실패를 한 사람을 조롱하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하지 말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라는 말을 진정 받아들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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