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읽은 한국 장편 소설 '유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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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매달 10권 이상의 책을 읽지만 한국 장편 소설을 읽는 일은 드물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한국 장편 소설 <유원>을 읽었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인터넷 서점에서 내가 구매하려고 정한 책들을 카트에 담다가 추천 도서 목록에 뜬 것이 계기가 되었다.

 책을 구매한 건 꽤 오래 전의 일인데 책을 펼쳐서 읽는 건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이게 모두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지난 주말 동안 막 쏟아지는 것도 아닌 형태로 비가 하염없이 오면서 괜스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때 이 소설 <유원>을 읽으니 딱 알맞았다.

 왜냐하면, <유원>이라는 소설이 그리는 이야기는 절대 방방 뛰어다니는 듯한 이야기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유원을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로 하고 있는 <유원>은 10년 전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은 아이, 아이의 부모, 아이를 살린 아저씨가 처음 등장한다.

 


 한 아파트 건물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나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유원과 그녀의 언니 예정이 미처 불을 피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고 있을 때 예정은 어린 자신의 동생 유원을 이불에 감싸서 아파트 밑으로 떨어뜨리며 누군가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때 유원을 구해준 인물이 어떤 아저씨다. 그 아저씨는 땅으로 떨어지는 유원을 구하려다 자신의 다리 한 쪽에 평생 안고 가는 장애를 안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이슈 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기사로 쓰기 아주 좋은 소재가 되었다. 살아남은 아이와 용감한 의인.

 매스컴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어린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두터운 이불로 동생을 감싸 아래로 떨어뜨린 죽어버린 언니를 칭송했고, 그렇게 떨어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마다하지 않은 아저씨를 극찬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훈훈한 이야기라며 두고두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살아남은 아이와 그 가족들은 그렇게 편안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아이는 모두에게 “너는 그러면 안 돼.”라는 시선을 받으면서 마치 살아있는 것에 굉장히 감사해야 하고, 평범한 또래 아이처럼 자라면 안 된다는 압박 속에서 자라면서 좀처럼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매번 주기적으로 찾아와 넌지시 대접과 돈을 요구하는 아저씨에게 얽매여 살아가고 있었다. 매스컴을 통해 비쳐진 것은 자신을 희생해서 동생을 구한 아이와 살아남은 아이, 그리고 남은 가족과 아이를 아래에서 받은 의인에 대해 보기 좋게 포장한 것뿐이었다.

그날 이후, 이전에 나를 몰랐던 사람들조차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를 위로하고 축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웃을 때면 생전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어하고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행복을 바랐다면서도 막상 멀쩡한 나를 볼 때면 워낙 뜻밖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당황했다. (본문 104)

 소설 <유원>을 읽고 있으면 괜스레 기분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벌써 몇 년이 지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언급되는 일이 줄어둔 세월호 사건만 하더라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와 의인, 그 가족들의 이야기.

 우리는 그저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일과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을 통해 정치적인 문제로 삼기만 했지, 실제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인터넷 댓글을 통해 가볍게 위로를 표하거나 의인에 대해 칭찬하거나 안타깝다고 가볍게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잘 살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메여 고통받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세월호 사건 때 의인으로 불린 인물이 아이를 더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살을 해버린 일도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만큼 어깨의 짐이 무겁지 않았을까?

 소설 <유원>은 10년 전에 발생한 화재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이와 아이의 가족, 그리고 아이를 구한 아저씨와 그 아저씨의 가족을 통해 삶의 무게에 대해 그리고 있다. 살아남았기에, 앞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유원이 선택의 기로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선택지와 다른 선택지를 고르면서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흐린 날에 옅은 비가 올 때 책을 읽어서 그런지 괜스레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런 기분 속에서 나는 공감하거나 멍해지기도 했다.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저런 눈을 하고 있구나. 목소리만큼 그고 위협적이지 않았다. 누렇고 흐리멍덩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

한참 후에 아저씨가 힘겹게, 숨을 고르듯 말했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게 아닌지 의심을 불렀다.

갑자기 창박에 비가 내렸다. 요 며칠 가을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등교할 때는 비 올 기미가 없어 놓고 왔다. 엄마 말을 귀담아들을걸. (본문 246)


 어떤 이야기를 읽고 공감하는 방식과 부분은 책을 읽는 사람 나름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몇 장면에서 멈추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오늘날 아빠 없이 엄마와 나, 동생 셋 이서 살아가는 우리 집을 다시 돌아보기도 했다. 사람의 삶은 특별해 보여도 대게 비슷한 법이다.

 오랜만에 읽은 한국 장편 소설 <유원>은 10년 전 화재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이가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평소 깊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즐겨 읽는다면 한번 <유원>이라는 작품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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