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이스3 완결, 보이스3가 보여준 일그러진 혐오
- 문화/문화와 방송
- 2019. 7. 1. 08:22
매주 토일 밤 10시 20분에 꾸준히 챙겨본 드라마 <보이스3>가 지난 6월 30일(일)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보이스1>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이 드라마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 <보이스1>은 단순히 범죄를 쫓는 형사 드라마에 그쳤지만, <보이스2>부터는 그 의미가 색달랐다.
<보이스2>에서 사건의 중심으로 다룬 닥터 파브르, 그리고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혐오 범죄를 그리며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드라마 <보이스2>를처음부터 시청하며 <보이스3>까지 모두 챙겨본 사람들은 드라마가 끝났을 때 멍한 기분이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이건 내가 좀 특이한 케이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젯밤 드라마 <보이스3>를 보고 나서 한동안 멍했다. 주인공 도강우와 실질적 배후로 꼽힌 카네키 두 인물의 결착과 그 이후를 그린 강권주 센터장의 독백을 보며 실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보이스2> 결말 부분에서 방제수가 올린 글에서 섬뜩하기도 했지만, 드라마 속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크기의 혐오는 분명히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는 악의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당장 드라마를 보았던 나도 범인의 시점에서 일부분 공감하며 그 혐오의 일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느꼈다.
혐오를 만드는 건 기본적으로 환경이다. 그 환경은 내가 좋아서 선택한 환경도 아니듯, 어쩔 수 없이 노출된 환경 속에서 자연히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생겨나는 게 바로 ‘혐오’라는 감정이다. 내가 학교 폭력을 당했던 시절, 가정 폭력을 당했던 시절에 품었던 그 살의 또한 같은 감정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저 그랬다.’라고 말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시절에 품었던 사람에 대한 혐오와 살의는 여전히 내 속에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잠재되어 있는 혐오와 살의는 어딘가에 분출할 장소가 없어 때때로 폭발해버리면서 이성을 잃게 하는 분노 조절 장애를 앓게 하기도 했다.
아니, 분노 조절 장애 이전에 나는 우울증을 앓으며 심각할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 사람에 대한 공포가 컸다. 그러한 무기력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괴롭혔던 녀석들의 목을 비틀고, 당한 만큼 되갚아주며 괴로움 끝에 죽여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이미 한 부분이 고장이 났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 타임라인으로 누군가가 이런 글을 올렸다.
댓글을 단 사람들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고, 댓글을 달았던 사람들처럼 ‘그냥 그런 일을 하거나 다른 평범한 일’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런 방향으로 먼저 생각하기 이전에 “데이트 폭행으로 끌고 들어간 거 아님?”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동안 내가 겪고, 목격한 일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솔직히 말해서 기브스와 목발까지 한 상태로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간다는 건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비슷한 사례를 언론을 통해 보았는가. 실질적인 사례는 훨씬 더 많을 거다.
간혹 이렇게 말하면 너무 부정적으로 본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사회는 아주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난 생각한다. 드라마 <보이스3>의 범죄자들이 말한 ‘혐오’는 아주 특별하게 강렬한 살의와 악의를 가지고 형성된 혐오가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혐오에서 출발했다.
그 작은 혐오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 더욱 덩치를 키웠고, 이윽고 한 사람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혐오의 감정을 부딪치게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인터넷에 만연하는 혐오는 새로운 혐오를 흩뿌리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악의가 충돌하게 하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건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혐오’라는 감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항상 타인에게 혐오를 부딪히며 자신을 정당화하고, 무리를 지어 행동하며 도덕적인 책임감을 회피하며 악의를 발산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면면이 그렇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람들은 이러한 혐오와 악의를 직접적으로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부딪히면 미쳤다고 말하고,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 같은 병명을 붙인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단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 커뮤니티의 댓글, 유튜브를 통해 조장하는 악의.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혐오가 흘러넘치는 세상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혐오의 감정을 품고 있이 않는 것 자체가 오히려 비정상이다. 왜냐하면, 혐오는 대단히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내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 혐오를 부딪친다. 난민의 편에 선 자들은 난민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고, 난민에게 부정적인 사람들은 난민의 편에 선 사람들에게 혐오의 감정을 드러낸다. 하다못해 직장 생활, 학교 생활, 친구와 연인 가족 관계가 다 그렇다.
누군가는 ‘애증’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고 난 생각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혐오’라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문득 품었던 타인에 대한 악의가 살의로 연결될 수 있는 계기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제어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오래전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라는 책을 읽어보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깊디깊은 악의가 잠재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악의가 이길 때, 사람은 사람이 아니게 되겠지요."라는 말이 있다. 딱 이 말이 우리 인간의 바탕이고, 사회를 형성해 살아가고 있는 거다.
드라마 <보이스2>와 <보이스3> 두 시리즈는 우리가 품고 있는 ‘혐오’라는 감정이 단순히 인터넷 댓글을 달면서 허세를 부리는 행위에서 벗어나, 잘못된 신념에 이끌려 혹은 ‘인내’와 ‘자제’라는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었다. 과연 우리는 거기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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