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여동생이 한국을 떠나 다시 호주로 향한 이유

우리가 아직 탈 헬조선을 바라는 이유


 한때 한국에서는 ‘헬 조선’이라는 단어와 함께 ‘탈 헬 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 단어들은 저녁 있는 삶, 온전히 내 삶을 살 수 있는 나라로 이민을 가거나 해외 취업을 꿈꾸는 청년 세대가 만들어낸 단어다. 이 두 단어가 의미하는 건 청년 세대의 바람이자 한국 사회의 분명한 한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외로 나간다고 해서 무조건 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외국인이라서 당할 수밖에 없는 편견과 차별을 이겨내야 하고, 낯선 사람들과 섞여 생활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든 불편한 점을 감수하고서도 많은 청년이 해외로 나가고 싶어 한다. 


 그만큼 요즘 청년 세대가 해외에서 누릴 수 있는 저녁 있는 삶, 내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증거다. 한국 기업 문화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그래도 선진적인 기업 문화로 직원을 배려할 수 있는 기업은 열 개의 기업 중 한두 곳에 불과하고, 대기업의 경우에는 임원급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현실의 벽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청년 세대는 한국을 가리켜 ‘헬 조선’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탈 헬조선’을 꿈꾸면서 캐나다 호주, 독일 등 ‘사람의 가치가 온전히 대우받는 나라’를 찾아 떠나려고 하는 거다. 작가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어보면 아래의 글을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는 매일 울면서 다녔어. 회사 일보다는 출퇴근 때문에. 아침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 거쳐서 가 본 적 있어?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신도림에서 사당까지는 몸이 끼이다 못해 쇄골이 다 아플 지경이야. 사람들에 눌려서. 그렇게 2호선을 탈 때마다 생각하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나? 보험 사기라도 저질렀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도 생각해. 너희들은 무슨 죄를 지었니? 

여자들더러 아이 많이 낳으라는 사람들은 출근 시간에 지하철 2호선 한번 타봐야 해. 신도림에서 사당까지 몇 번 다녀 보면 그놈의 저출산 이야기가 아주 쏙 들어갈 텐데. 그런데 그런 소리 하는 인간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 않겠지. (본문 16) 


 아주 짧은 글이지만 한국의 현실을 잘 볼 수 있는 글이다. 실제로 뉴스를 통해서도 출퇴근 시간에 사람으로 북적이는 지하철의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출퇴근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제는 해탈에 경지에 이르러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늘 아등바등 살아야 한다는 게 할 말이 없다. 


 한국에서 삶은 늘 이런 식이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여기서 ‘정’이라고 말하는 한국 고유의 정서적 공감대가 태어나기도 했지만, 사람에 치여 살면서 나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과 나보다 조금 더 위에 있는 사람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숱하게 짓밟힌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흔히 말하는 갑질이 그렇다. 돈만 있으면 한국 사회는 어떤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이지만, 돈이 없으면 한국 사회는 정말 지옥 같은 나라다. 영화 <신과 함께>의 저승사자도 “한국은 돈이 없으면 지옥보다 더 지옥이거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어찌 한국 사회를 ‘헬 조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처럼 우리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면, 정치인들은 “그런 것도 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야지. 방법이 없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앞에서 언급한 <한국의 싫어서>의 주인공이 혼자 읊조린 ‘그런 소리 하는 인간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 않겠지.’라는 말이 딱 알맞다. 


 매번 선거철이 되어야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올려주겠다고 말하고, 실천도 하지 않을 복지공약을 내걸고, 평소에는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하며 뻣뻣한 고개를 숙일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애원하며 큰절까지 올린다. 사람을 미끼로 내걸어 지키지도 않을 사람을 말하고 있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으면 주인공이 호주에서 보내는 삶과 한국에서 보낸 삶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하나하나 한숨을 내쉬며 읽게 된다. 굳이 주인공이 말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보내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지적하는 하나하나가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이 무조건 호주를 찬양하고 한국에 날 선 비판을 가하는 건 아니다. 호주의 문제점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호주에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책에서는 이런 장면도 만날 수 있었다. 


나도 알아. 호주가 무슨 천사들이 모여 사는 나라는 아니야. 전에 한 번은 트레인에서 어떤 부랑자가 나한테 오더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 시민권 취득 시험이라고, 없던 시험까지 생겼어. 문제도 꽤 어려워.... 크리켓 선수 이름 같은 게 막 문제로 나와. 그런데 내가 그 시험 공부하다가 그래도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 게 있었지.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라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라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본문 171)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게 당연시 여겨지는 나라와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의 차이는 바로 이렇게 국가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이 싫어서>의 이 대목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면, 어떤 사람은 “사회주의다! 그렇게 싫으면 북으로 가!”라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의 한계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배척하는 특성.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성추행 문제를 고발하면 내부고발자가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입는 시스템 구조. 이렇게 기업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놓인 여러 시스템이 항상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으면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 있더라도 ‘다 그렇다. 이렇게 안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며 애써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더 나은 사회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내 삶을 살기 위해 호주를 선택한 주인공을 응원했다. 


 지난여름에 사촌 여동생도 호주에서 워홀을 하다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한 곧바로 다시 호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선택지를 버린 사촌 여동생도 어쩌면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처럼 호주에서 진짜 자유로운 삶을 발견한 건지도 모른다. 


 참, 부러운 일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발견해서 그 삶을 살고자 과감히 떠나는 행동력과 과감히 하나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행동력을 지닌다는 건. 일본에서 인턴을 한 기업도 대단히 자유로운 분위기라 ‘와, 이런 데라면 정말 한 번쯤 일해보고 싶다!’라고 생각만 했을 뿐, 나는 아직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다. 


 협성 문화 재단에서 열린 공모전에 응모하고자 다시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글을 쓰며, 나는 재차 내 삶을 사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탈 헬조선은 나와 같은 젊은 세대만 아니라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오늘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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