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가 나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 문화/독서와 기록
- 2017. 3. 18. 07:30
내 삶에서 주인공이 되기 위한 미움받을 용기
사람이 생물로서 살아가는 데에 산소, 물, 음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돈을 비롯한 여러 물리적 요소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삶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게 모든 우리의 삶을 위해서죠.
하지만 저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이외에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용기입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내가 주인공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우리가 조연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금수저, 흙수저로 나누어지는 세상에서 수저의 색에 따라 출발선이 다르고, 우리가 달릴 수 있는 속도와 목적지마저 너무나 다르니까요.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이런 현실 속에서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남이 평가하는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며 '나는 너무나 못났어. 저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뚱뚱하고, 말투도 어눌하고, 잘하는 것도 하나도 없고.'라며 최소한의 자존감마저 잃어버리는 일도 한순간의 일에 불과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남의 평가에 주눅 들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가 '나'인 채로 그저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늘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미움받을 용기>를 읽어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철학자 : 내가 아는 젊은 친구 중에 소설가를 꿈꾸면서도 도무지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이가 있네. 그의 말에 따르면, 일하느라 바빠서 소설 쓸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니 원고를 완성하지 못해서 문학상에 응모할 여력도 없다는 거야. 과연 그럴까?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 남의 평가를 받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졸작을 써써 냈다가 낙선하게 되는 현실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거지.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 환경만 허락된다면 쓸 수 있다, 나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싶은 걸세. 아마 그는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면 "이제는 젊지 않으니까" 혹은 "가정이 있어서"라는 다른 핑계를 대기 시작하겠지.
청년 : ……저는 그 친구 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요.
철학자 : 문학상에 응모했다가 떨어지면 좀 어떤가? 그걸 계기로 더 성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되지. 어쨌거나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네. 지금의 생활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그런 거야. 시도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어.
청년 : 꿈이 깨질지도 모르잖아요!
철학자 : 뭐 어떤가. 단순한 과제 해야 할 일을 앞두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이리저리 찾는 게 더 고달픈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소설가를 꿈꾸는 내 친구의 경우는 '본인 스스로'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일세.
청년 :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아, 환경도 관계없어.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고, 네가 불행한 것도 다 네 탓이야" 하는 것 같아서 단죄당하는 느낌이라고요!
철학자 : 아니,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오히려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라고 말해주는 거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본문 67)
어쩌면 우리는 철학자의 친구처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고, 청년처럼 철학자가 말하는 주장에 반기를 들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책 속에서 읽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게 느껴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배나 더 없는 것 같으니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논의가 되었던 청년 수당 제도도 현실을 반영한 제도입니다. 청년이 아무리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 청년들을 돕기 위한 제도가 필요한 것이죠. 처음 <미움받을 용기>를 읽을 때 저는 이런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솔직히 궤변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니 살짝 다르게 생각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철학자의 말대로 과거의 내가 어떠했기 때문에 미래의 나 또한 그럴 것으로 생각한 부분도 적잖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변에는 핑계를 찾기보다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죠.
제가 아는 블로거 중에서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적어 책을 꾸준히 내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철학자 친구와 달리 어쨌거나 시도를 해본 사례입니다. 그러나 저는 부끄럽게도, 대학 생활이 바빠서, 블로그 글쓰기에 바빠서 등의 이유로 책을 쓰는 일에 제대로 시도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핑계를 대면서 도망쳤던 거로 생각합니다. '내가 해봤자 좋은 책이 나올 리가 없잖아?'는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없었고, 내가 자신에게 용기가 없는 것을 탓할 수 없어 환경을 탓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저는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며 고민했습니다.
어떤 일을 시도해보는 용기는 굉장히 큰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도전정신'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과감히 도전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쓸데없이 앞으로 나섰다가 사람들의 핀잔을 들을 수도 있고, 괜히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움받을 용기>의 철학자는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대로 멈춰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대로 멈춰 있으면 우리가 스스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자기 비하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대로 멈춰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책에서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철학자 : 자네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네. 나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청년 : 아니, 그건 너무 이기적인 논리예요. 나만 생각하고 독선적으로 살라는 말씀이세요?
철학자 : 유대교 교리를 보면 이런 말이 있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자네는 자네만의 인생을 살고 있어. 누구를 위해 사느냐고 하면 당연히 자네를 위해 살아야겠지. 만약 자네가 자네를 위해 살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자네의 인생을 살아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생각하며 사는 거라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이유가 없지. p154
철학자가 언급한 유대교 교리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는 말은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를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을 사는 데에 있어 타인의 평가는 타인의 평가일 뿐이니까요.
한국 사회는 적어도 다른 사회보다 타인의 평가를 확실히 좀 더 신경 쓰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타인으로 분류되는 사람한테 휩쓸리며 대학에 가고, 직장을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기도 하죠. 그런데 타인에게 휩쓸려 선택한 결정에 과연 행복이 있었을까요? 불행하지 않더라도 절대 즐겁지가 않습니다.
비록 당장 우리 눈앞에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용기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용기가 아닙니다. 잘못했을 때는 잘못을 인정하고, 실패했을 때는 왜 실패했는지 반성하는 것도 아주 큰 용기입니다.
저는 <미움받을 용기>의 제목이 가진 '미움 받을 용기'란 바론 그런 용기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잣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건 약간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내 삶의 주인공이기 위해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미움받을 용기>의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두고, 다른 사람이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건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을 모든 사람으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의견이 나누어지게 마련입니다. 원래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갈등과 화해의 반복이니까요.
제가 어릴 적에 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최후의 도전을 할 때, 항상 그 옆에서 주인공을 지켜보던 인물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나아가는 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갈채인가, 조롱인가?" (카레이도 스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갈채일 수도 있고, 조롱일 수도 있습니다. 갈채를 받는다면 대단히 기쁠 것이고, 조롱을 받는다면 몹시 씁쓸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실패해서 조롱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경험이 남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죠.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영화의 주인공, 소설의 주인공이 모두 빛나는 이유는 '지금, 여기'를 소중하게 여기며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혹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걱정하느라 '지금, 여기'를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나요?
오늘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은 어떤 용기가 필요하신가요?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용기인가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할 수 있는 용기인가요? 꿈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용기인가요? 아니면, 지금 이대로의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인가요? 그 어떤 용기라도 하더라도 여러분이 용기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저를 사랑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무척 가지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쓴 글은 <미움받을 용기>의 단편적인 장면을 가지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붙인 글입니다. 좀 더 책의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미움받을 용기> 책을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책은 제 글보다 더 많이 담겨 있으니까요.
▶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한 블로거 노지를 응원하는 방법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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