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속 인문학, 패션은 삶의 방식을 드러낸다
- 문화/독서와 기록
- 2016. 9. 8. 07:30
오늘 어떤 옷을 입고, 누구와 만나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매일 아침 사람들은 옷장 앞에 서서 '오늘은 도대체 뭘 입고 가지?'라는 고민을 한다. 특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 깊숙이 있는 옷을 꺼내는데, 그때마다 '입을 옷이 없어!'라는 불평을 한다. 작년에 분명히 벗고 다닌 게 아님에도, 해가 지나고 보면 이상하게 옷장에서 꺼내서 입을 옷이 없는 거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정말 옷을 버려서 옷이 없을 수도 있고, 하나는 옷의 유행이 지나서 꺼내서 입기 꺼려질 때가 있고, 하나는 신체 사이즈가 달라져서 작년 옷을 입을 수 없을 때가 있다. 특히 세 번째의 경우 사람들은 신체적 콤플렉스를 겪으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나의 어머니도 항상 옷장 앞에서 옷을 찾으며 '입을 옷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어머니는 올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인지 체중이 꽤 느셨다. 그 탓에 작년에 입은 옷의 사이즈가 맞지 않아 꽤 옷을 찾아 헤매신다. 반면에 나는 옷을 거의 사지 않는 터라 아직도 2010년에 산 옷을 그대로 입는다.
이제 슬슬 가을이 되어 가을 바지를 꺼내서 입었다.(이 바지는 2010년부터 입은 바지이다.) 며칠 입고 다니다가 우연히 옷이 상당히 해진 것을 보고, 이제 더는 입을 수 없을 것 같아 새 바지를 사려고 고민하고 있다. 나는 옷을 살 때마다 같은 옷을 2벌 정도 사기 때문에 거의 옷차림이 바뀌지 않는다.
아마 모두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옷을 사고, 어떤 옷을 어디에 갈 때 입을지를 고민하면서 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단순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옷을 살 때 고민하는 '어떤 옷을 입을까?'는 '왜 이 옷을 선택했을까?'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인문학적 질문을 하게 된다.
오늘 소개할 책 <옷장 속 인문학>을 읽어보면 이런 글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유리거울 제조기술이 현저하게 발달하면서 인식론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벽거울과 손거울, 화장용 거울 등 평면 유리거울을 통해 자신을 매일 들여다보면서 사람들은 자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또 이때부터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타인의 옷차림과 제스처, 표정을 따라 하고 경쟁했다. (본문 98)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자의식을 키웠고,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인과관계가 굉장히 놀랍다. 인문학적 사고는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옷을 입기 위해서 늘 '왜 이 옷을 나는 선택했을까?'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를 나타내는 방식이 된다.
<옷장 속의 인문학> 책은 이런 접근을 통해서 우리가 입는 패션과 스타일을 통해 인문학을 말한다. 패션과 스타일의 탄생배경부터 시작해서 옷이 어떻게 우리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트렌드 속에서 '진짜 중요한 나를 위한 패션'은 무엇인지 상세히 말한다.
옷장 속 인문학, ⓒ노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약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패션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는 옷을 스스로 산 적이 거의 없다. 대체로 모두 어머니가 사주신 옷을 입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특별히 어떤 옷을 입고 싶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교복처럼 매일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호했다. 대학 개강 시즌에 가면 향수와 새 옷의 냄새가 여기저기 퍼져 있는데, 정말 나는 그런 환경이 낯설었다. 2학기 개강에 입은 옷도 나는 2010~12년 사이에 구매한 옷이고, 튀는 옷보다 수수하게 아저씨 같은 옷이 많았다.
어머니는 종종 '옷이라도 좀 잘 입고, 면도도 매일 하면서 깔끔하게 다녀라. 그렇게 해야 여자가 붙지.'라며 잔소리를 하셨다. 나는 옷을 챙겨 입을 여유가 없다고 말하기보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다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몸매와 내 얼굴로 무슨, 대충 입으면 되지….'라는 방식이었다.
아마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비슷한 사고를 하고 있지 않을까. 어릴 때 외모로 놀림을 받거나 비교를 통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결과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게 해주는 게 중요한데, 옷 또한 그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책을 읽어보면 미니스커트의 창시자인 메리 퀸트가 한 "패셔너블한 여성은 옷을 자신에게 맞추지, 옷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는 말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잘 나온 옷에 나를 맞추고, 전형적으로 추구 받는 이상적인 몸에 너무 집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옷장 속 인문학, ⓒ노지
유명한 모델처럼, 옷 가게에 전시되어 있는 마네킹처럼, 날씬하고 근육이 적당히 붙은 몸을 갖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그런 몸매는 비현실적인 몸매다. 마네킹은 시대마다 선호하는 이상적인 체형의 표현이라고 한다. 우리가 굳이 거기에 맞추거나 비교하며 스스로 자존감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다.
국내 여성복 마네킹을 보면 다리가 하나같이 길쭉하고 말랐다. 키 178센티미터, 가슴둘레 81.3센티미터, 허리둘레 58센티미터, 엉덩이둘레 83.8센티미터를 표준 체격으로 설정한 탓이다. 이건 실제 한국 여성의 신체표준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기술표준원의 '한국인 표준 사이즈'를 보면 20대 여성의 편균 신체 치수가 키 160센티미터, 가슴둘레 82.2센티미터, 허리둘레 67.3센티미터, 엉덩이둘레 90.8센티미터다. 실제 표준 사이즈와의 격차가 커도 너무 크다.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는 이미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강마른 마네킹을 퇴출하고 있다. (본문 130)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기준은 늘 현실과 조금 떨어져 있다. 분명히 천성적으로 좋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옷을 입는다는 건 몸을 옷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내 몸에 맞게 옷을 맞추는 것이다. 옷맵시를 어떻게 하고, 색을 어떤 색으로 하는지에 따라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옷을 입는다는 건 나를 똑바로 마주하는 일이다. 화장을 하는 것도,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를 하는 것도, 시계를 차는 것도, 모두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다. 그리고 '어떤 옷을 입을까?'는 고민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보고, 나를 겸허하게 나타내면서 상대방에게 호감을 줄 수도 있다.
이 정도면 우리가 패션에 작은 신경을 쓸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옷장 속 인문학>을 통해 나는 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너무 무심하게 아무런 옷을 입었던 나에게 조금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내가 선호하는 옷은 심플하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이 옷은 내가 추구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비록 모델 같은 몸과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오늘도 열심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나를 위해 옷 한 벌의 선물을 스스로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아는 유행하는 패션이 아닌, 나를 알아가는 패션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인문학이라고 어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마지막으로 아래의 글을 남긴다.
체이스는 미국 내 최초의 패션쇼를 열고 스포츠웨어를 특징으로 한 미국만의 독자적 패션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그녀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는 패션이 아닌 스타일을 소유해야 한다."는 패션계 불멸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는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소유하다'고 번역되는 'possess'에는 '어떤 존재가 도리 수 있는 잠재력'이라는 또 다른 뜻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스타일이란 내가 꿈꾸는 존재가 될 수 있게끔 해주는 힘이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스타일에 의존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존하다'라는 뜻의 한자가 '의의)'가 사람이 옷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내면과 외양을 가꾸고 만들어나간다. 당신은 지금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며 당신을 스타일링해나가는가? (본문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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