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소설 <표백>은 파격적인 도발이자 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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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세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예리하게 난도질한 이야기, <표백>


 소설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를 읽으면서 큰 공감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통해서 그의 또 다른 소설 <표백>과 <그믐>을 주문했다. 소설 <그믐>은 다른 책과 같이 주문을 해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표백>은 금방 도착했다.


 소설 <표백>을 펼쳐서 읽는 동안 나는 소설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랍도록 정교하면서도 놀랍도록 도발적인, 그리고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듯한 소설 <표백>은 책을 펼치고 읽어나가면서 점점 이야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마력을 가졌다.


 <표백>보다 먼저 읽은 소설 <한국이 싫어서>도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상당히 우회적으로 비판했지만, 이 소설은 완전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마주하게 해주었다. 일단 먼저 아래에서 <표백>의 한 장면을 읽어보자. 단지 이 부분을 읽는 것으로 나는 '!!' 부호를 머리 위에 띄울 수 있었다.


"도전 정신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젊은이고 나이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다 가져야지, 왜 청년들한테만 가지라고 하나요?"

"젊을 때는 잃을 게 없고, 뭘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그럴 때 여러 가지 기회를 다 노려봐야 한다는 얘기지. 그러다가 뭐가 되기라도 하면 대박이잖아."

"오히려 오륙십 대의 나이든 사람들이야말로 인생 저물어 가는데 잃을 거 없지 않나요. 젊은 사람들은 잃을 게 얼마나 많은데…. 일례로 시간을 2, 3년만 잃어버리면 H그룹 같은 데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잖아요. 나이 제한을 넘겼다면서."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경험이 남겠지."

"무슨 경험이 있든 간에 나이를 넘기면 H그룹 공채에 서류도 못 내잖아요."

"얘가 원래 좀 삐딱해요."

누군가 끼어들어 제지하려 했으니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면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p27)


 인상적인 시작이었다. <한국이 싫어서>의 시작도 한국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호주로 떠나는 계나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에 곧장 몰입할 수 있었는데, <표백> 또한 마찬가지로 이런 시작으로 점점 더 소설의 내용에 집중하게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동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빠져들었다.


표백, ⓒ노지


 솔직히 나는 이 소설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 책 서평을 쓰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라면 <표백>에 담긴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이 소설이 가진 그 이야기를 명료하게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다.


 <표백>을 다 읽자마자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초에 주인공의 이름이 언급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오직 '나'로 서술을 했던 것 같다. 나와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맺은 인물 세연, 휘영, 추 같은 인물의 이름만 떠오르는데, 그만큼 이야기에 집중했던 것 같다.


 <표백>의 이야기는 자살 선언을 하고 자살을 한, 패배자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살한 세연을 따라서 자살을 하는 불우한 표백 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연이 죽은 후에 그녀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보내진 메일과 자살 사이트 '와이두유리브' 사이트와 잡기가 메인이다.


 세연은 자신이 자살하기 전에 몇 번이나 자신을 따라 죽을 인물들에게 부채질을 했었다. 그녀는 그 인물들의 이름을 소크라테스, 루비, 하비, 재프루더 등의 이름으로 적어 놓았는데, 이 이름에 감춰진 비밀을 찾는 것과 자살 사이트 '와이두유리브'의 감춰진 실체가 드러나는 부분은 놀라웠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을 뻔했다. 절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했을 때 자살하지 마라. 그런 때 자살하면 세상은 당신의 선언을 그저 패배자의 개인적인 도피로 여길 것이다. 여태까지 인터넷 자살 사이트나 집단 자살자가 그렇게 많았건만 모두 잊힌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자살하든 세상은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심적 갈등이 심했고 도피처를 찾던 중이었다"라고 우겨댈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참았다가 당신이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실행하라. 이 선언이 분명한 사회적 저항임을 전달하려면 그래야 한다. (p160)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 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p192)


 단순히 놀라운 게 아니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속 자살 사건은 충격적이면서도 책을 읽는 독자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혹시 이런 일이 현실로 벌어지거나 하지 않을까?' 같은 바보 같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나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과연 현실 속에서 세연처럼 정교하게 모든 것을 꾸밀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 소설 속의 이야기다. 현실성을 띈 허구이지만, 그렇기에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 세계는 분명히 캄캄하지만, 그 어둠을 걷어낼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표백 세대로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이라는 질문을 해보았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금 눈앞에 놓인 현실과 내가 하고 싶어 했던 일과 이루고 싶은 꿈 등의 진짜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역시 명확한 답은 건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이니까.'이라는 이유가 전부였다. 어쩌면 '하고 싶어서 한다.'는 이유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가장 명료하면서 확실한 답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이유가 100% 확실성을 띌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의 의지가 과연 얼마나 개입되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첫 공판에서 검사가 뭔가를 질문하자 그녀는 대답 대신 '여기 계신 판검사님들은 정의감 때문에 사법고시를 보신 건가요, 아니면 그냥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고 부모님이 원하니까 판검사가 되기로 하신 건가요?"라고 물었다. 결국 법정모독죄로 감치 명령 7일을 받았고, 그 결과 검찰과 법원만 꼴이 우스워졌다.

불쌍한 담당 검사와 판사는 아무 잘못도 없이 인터넷에서 조롱거리가 됐다. 두 번째 공판부터는 와이두유리브닷컴 회원들이 방청석에서 조직적으로 세화를 옹호하거나 검사를 야유하는 발언을 해 법원 경위에게 붙들려 쫓겨나기도 했다.

1심 재판부튼 피고인에게 개전의 정이 없다는 이유로 이례적으로 집행유예 없이 실형을 선고했다. 징역 6개월. 그러자 세화와 세화의 변호사가 "사회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볍다"라며 항소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p327)


 사실 이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인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과연 우리가 품은 꿈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정해진 틀 속에서 정해진 경쟁을 강요당하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진실로 내가 바라는 희망이자 꿈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세연이 운영하며 목표를 가졌던 사이트 '와이두유리브닷컴(whydoyoulive.com)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그저 맹목적으로 눈앞에 던져진 일을 하거나 같은 곳을 바라볼 뿐이니까.


 뭐, 이것은 어디까지 개인적인 의견이기에 소설가 장강명 씨가 <표백>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가 담은 어떤 의도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독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작품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나는 소설 <표백>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표백'이라는 말을 다음에서 검색해보니 '볕에 쬐이거나 약품을 써서 희게 되다.'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결국, '표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텅 빈 백지처럼 우리가 표백 세상에 녹아들고 있다는 뜻을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명절 추석이 되었음에도 우리 주변에는 '풍성함'보다 '삭막함'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분위기다. 대학가와 노량진에서는 취업 준비를 하는 많은 수험생과 고시생이 함께 어울려 열심히 책을 펼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런 세대를 가리켜 '표백 세대'라 말하지 않으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눈앞에 놓인 선택지, 다른 사람이 건네준 선택지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는 삶을 강요받는 우리는 그래서 사회에 저항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표백>의 세연이 사회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히 영웅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소설 속의 세연이 되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글쓰기밖에 없으니 특별한 게 없는 것 같다. 단지, <표백>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건, 세연이 쓴 잡기 같은 글을 한번 연재해보고 싶다는 마음일까? (작가가 썼지만)


 글을 마치는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은, 혹시 시간이 생긴다면 이 소설 <표백>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냥 서평단의 의무로 권하는 게 아니라(이 책은 내 돈으로 직접 구매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당신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Why do you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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