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 권리가 괴롭힐 권리로 바뀌어버린 학교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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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폭력이에요? 아니에요. 그냥 장난치면서 노는 거예요."


 언론에 '한국 아이들은 놀 권리를 모른다.'이라는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놀 권리 그런 것도 있어?'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리고 이번 보도를 통해 한국의 아이들이 누리지 못하는 놀 권리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와 학원을 오가면서 문제집을 풀고, 영어 단어를 외워야만 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의 많은 어른은 아이들에게 '그 시절에는 공부를 해야 해!', '공부 안 하면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대학 안 나오면 아무것도 안 돼. 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일단 대학은 가고 봐야 해.', '내가 너에게 투자한 돈이 얼마인지 아니?', '내가 대학원도 포기하면서 너에게 돈과 시간을 썼단 말이야! 넌 시키는 대로 해야 해!'이라며 강요 아닌 협박을 하니까.


 모든 어른이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은 UN 인권 헌장에 있는 '놀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이 난다'고 생각하고 있고, '공부해야 부모의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기에 그들은 다른 것은 제쳐 두고 오직 공부만 하는 기계로 전락해버린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 사이에서는 '잘못'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똑바로 서지 못한다. 부모조차 아이들에게 지금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자신이 옳은 것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게 왜 내 아이의 잘못인지도 모르는데, 아이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비록 안다고 하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들의 잘못을 고쳐지지 못한다.


ⓒ학교의 눈물


 많은 학교 폭력이 이런 이유로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은 어느 순간에 가정과 학교 사이에서 균형이 깨져 버렸을 때에는 공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손에서 놓은 채 길거리를 방황하는 가출 청소년이 되어버린다. 갈 곳이 없어진 청소년은 당연히 똑같이 자란 어른들의 장난감이 될 수밖에 없고, 한 번 뒤틀어진 그 길은 점점 더 뒤틀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든다.


 김해에서 일어난 '김해 여고생 살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다. 입에 담기고 힘들 정도로 잔인했던 그 사건은 가출한 청소년을 장난감 삼아서 논 어른들이 그 뒤에 있었다. 그 어른도 똑같이 어릴 때부터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어른으로부터 똑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해 사이코패스로 자랐고, 그 기질로 방황하는 청소년을 꼬드겨 그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보면서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절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학교 폭력은 남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가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남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주어져야 할 '놀 권리'는 어른들의 방치와 잘못된 가치 교육으로 '괴롭힐 권리'로 이름을 바꾸어버렸다. 아이들은 어른이 했던 것처럼 자신보다 조금 못난 아이를 차별하고, 자신보다 조금 부족한 아이를 악랄하게 괴롭히고, 어른들이 잘못을 반성하지 않은 채 '내가 뭘 잘못했는데?'이라며 기세등등해 하는 모습 그대로 '그냥 장난친 거에요. 이게 무슨 폭력이에요?'이라는 말을 한다.


 아이들이 못나서 모자란 게 아니고, 아이들이 나빠서 못된 것이 아니다. 그 아이들을 책임지고 똑바로 교육해야 하는 어른이 똑바로 하지 못했기에 아이들은 망가져 버린 것이다. 좋은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부모 자신의 시간과 돈을 써가면서 아이에게 투자하는 것만이 아니다. 좋은 부모는 먼저 자신이 행복해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아이에게 행복을 가르쳐주는 부모이다.


미아는 벽장 안쪽에 '미아의 방'이라고 적은 종이를 붙이려 했으나 그것만은 못 하게 했다. 마치 자기 손으로 딸을 벽장에 쑤셔넣은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에미는 깨달았다. 미아가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이 벽장 속뿐이라는 사실을. 자기 방을 갖고 싶었던 건 어머니에게서 도망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란 걸.

벽장에 들어간 미아는 즐겁게 웃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틀렸을까? 왜 그런 애로 자란 거지?"

"'누군가를 위해서' 라는 말은 여차할 때 그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기에 딱 좋은 말이죠. 알고 계셨나요?"

"……뭐야? 설교하겠다는 거야?"

화를 낼 기운도 없는 에미는 타비토를 보며 엷은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타비토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이가 바라는 건 단 하나뿐입니다. 부모님의 웃는 얼굴이죠. 미아를 위해 하는 일이라면서 당신이 그렇게 난폭하고 거칠게 굴면 그 감정을 전부 받아내야 하는 아이는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요. 부모인 당신이 미아와 함께하는 삶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아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

(p207, 탐정 히구라시 타비토가 잃은 것)


 그런데 어른들은 모른다. 많은 부모가, 많은 교사가 모른다. 그저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 불행의 책임을 아이에게 떠넘기면서 아이가 좀처럼 웃으면서 지낼 수 없도록 한다. 놀 권리를 빼앗고, 공부해야 하는 의무만 쥐여주고, 웃을 수 있는 시간도 주지 않고, 울 수 있는 시간도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긋나버린다.


 부모의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교사의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일을 하기로 한 이상은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아이를 가리켜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다 망가졌잖아? 너를 위해서 내 인생도 포기했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이라며 아이를 몰아붙이는 건- 흉기로 아이의 살아갈 마음을 찌르는 것과 다름없다. 왜 그렇게 잔인해지려고만 하는가!


 어른들의 그런 탐욕과 무책임함에 아이들은 망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의 망가진 모습은 학교 폭력이라는 슬픈 모습으로 나오고 있는데, 어른들은 그것을 외면하면서 덮어버리려고 한다. 지난 몇 년간 보도되었던 학교 폭력이 보도되지 않는다고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일어나고 있는 데에도 어른이 덮어버리는 것이다. 얼마 전 JTBC 뉴스룸에서 나온 것처럼 말이다.


학교 폭력, ⓒ뉴스룸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는 분신 자살을 한 경비원 때문에 아파트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면서 경비원을 집단 해고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어른들은 바로 이런 사회를 만들고, 이런 사회를 지지하고 있다. 그런 어른들의 밑에서 배우는 아이들은 오죽하겠는가? 똑같다. 괴물 밑에서는 괴물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는 어른 밑에서, 어찌 사람을 존중하는 아이가 나오겠는가?


 놀 권리가 괴롭힐 권리로 바뀌어버린 학교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의 책임은 어른에게 있다. 그냥 가볍게 생각하면서 문제를 넘기지 말고,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좀 더 심각하게 문제를 바라보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하자.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이들의 놀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해주고, 아이가 웃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비록 "사랑해, 축복해"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다 망가졌어."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게 바로 부모와 교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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