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1610호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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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발목 개방형 골절로 긴 시간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지금도 재활의 과정에 있는 물리치료를 위해 김해 중앙병원에 입원하고 있다. 10월 중순에 발목에 박힌 두 개의 핀 중 한 개를 제거하기 위해 또 수술을 받아야 해서 앞으로 어느 정도 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해야 하는지 쉽게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다. 언제 회복이 될지 모르는 발목 상태가 가장 큰 걱정거리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이 상처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있다. (수술 비용과 입원 비용은 발목 상태보다 더 큰 걱정거리이긴 하지만, 이 큰 걱정거리보다는 우선 수위가 뒤로 밀린다.) 바로,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과 생활해야 하는 병원 생활이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듯하다.

 트라우마. 난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트라우마라는 단어에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의미는 '안 좋은 기억'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안 좋은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억이 꽤 오랜세월 동안 쌓여있다. 지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주군의 태양'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종원(소지섭)은 태공실(공효진)을 보며 머릿속으로 계산은 되지만, 가슴으로 계산되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나에 한해서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라는 감정이다. 머릿속으로는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라고 계산하지만, 가슴속으로는 '무섭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는 계산이 안 되는 감정이 나를 지배한다. 이건 과거에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때문이다.


 현재 24살에 불과하지만, 내가 정말 아무런 걱정 없이 모든 것이 즐거워서 웃을 수 있게 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재수 생활을 했던 20살까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부터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정말 지우고 싶은 기억을 많이도 가졌다. (그래도 20살까지 살면서 만났던 책과 애니메이션은 그 사이에서도 희망을 주었고, 나를 웃게 해주었다. 내 유일한 친구로서.) 누군가에게는 조금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이 정말 무서웠다. 내게 사람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폭력'이라는 그 하나의 비상식적인 것을 가져다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남중을 다니면서 겪었던 '최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던 학교생활, 그리고 가정에서 계속된 아버지의 폭력은 다른 평범한 사람보다 '비슷한 또래의 남성'과 '아버지 같은 술을 자주 마시는 강압적인 분위기의 남성'에는 더 과민하게 반응을 하게 되었다.


 알고 있다. 남자인 내가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해오고 있다. 블로그를 하면서 알게 된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그 노력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인연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얼마 하지 않는 바깥 생활에서(거의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니까) 가끔 우연으로 부딪히게 되는 과거 트라우마를 발산시키는 그런 사람― 특히 남성 ―을 만나면, 내 가슴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다. 한두 시간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만 날수록 나는 점점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과도한 대인공포증 때문에 약을 먹기도 했었던, 우울증 때문에 약을 먹기도 했었던 나이기에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평소 생활은 정상이다. 오로지 함께 하는 공동생활, 단체 생활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물리치료 때문에 갑자기 하게 된 입원생활에서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4인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바로 내가 김해 중앙병원에서 생활하게 된 1610호다. 처음 1610호에 들어갔을 때에는 온화한 표정의 아저씨 한 분(50대 정도로 예상한다.)만이 계셨다. 치료기간 동안 입원생활을 해야 했던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또 다른 사람이 1610호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20대 후반의(이 사람의 친구들이 와서 서로 떠드는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됨.) 남성이었는데, 그 사람으로부터 풍기는 분위기는 과거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사람들의 분위기와 거의 흡사했다. 처음 그 사람이 병동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내 마음 한구석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마음 놓고 웃음을 짓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그래도 처음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내가 불안해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내 옆의 커튼을 치는 배려를 나름대로 해주었고, 나는 이때까지 '내일이면 통원치료를 하니까'는 안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는 어느 정도 버텼다. 가슴 속에서는 쉽게 진정되지 않는 공포가 자라고 있었지만, 책을 보면서― 헤드폰으로 애니메이션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진정시켰다. 그러나 다음날,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나의 이 마음은 한 번의 말로 급격하게 흔들리게 된다. '입원을 더 오래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여기서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과거, 나는 학교에서 수련회를 가거나 어디를 가더라도 늘 혼자가 아니면 불안했다.) 어머니께 1인실로 옮기거나 퇴원을 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해주시지 못했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마음은 내가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붕괴하고 말았다. (옆에 있는 그 사람을 찾아온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도 그와 비슷한 분위기였었기 때문에 나는 어제부터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는 나도 잘 기억하지 못했던,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좋지 않은 검은 기억들이 셀 수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완전히 검정이 되었다. 탁한 검정이.





  내 몸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조절되지 않는 감정 때문에 눈물은 쉴새 없이 흘렸고, 몸의 이상적인 발작은 나 자신을 더 내가 아니게 만들었다. 그런 쇼크 때문에 나는 병실 1610호를 탈출해 1인실로 갈 수 있었고, 혼자 있으면서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왜 눈물이 흐르는지, 왜 계속 그런 탁한 검정을 칠한 더러운 감정과 기억들이 나를 괴롭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순간에 할 수 있었던 건 '나는 왜 이 모양인 걸까'는 자책뿐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어머니께 끼친 폐, 간호사님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끼친 폐. 그 모든 것 때문에 나는 더 눈물을 흘렸어야만 했다. 분명히 나는 일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1610호에 입원한 첫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감히 누구에게도 다 말할 수 없었다. 이 가슴 속에서 싹트는 공포를, 나를 지배하여 나 자신이 내가 아니게 만드는 이 공포를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1610호를 탈출해 혼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해결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런 과정을 겪고, 9월 18일, 나는 1박 외박을 어머니께 부탁하여 지금 집에서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20일에 발행될 예정이기에 지금 글을 읽는 사람들은 20일에 우연히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이다. 나는 19일에 다시 병실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른다. 그저 사람들 속에서 평범히 버티기가 어려운 한 명의 말도 안 되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건 소설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 내가 겪었던 일이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반복될 일이다. 나는 언제나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 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를 바꾸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는 이렇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아, 일종의 이건 면죄부이자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나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추석을 앞두고 있었던 나의 병실 1610호 탈출기는 그렇게 시작하여 막을 내렸다. 블로그로 먹고사는 처지에 1인실에 오래 있을 수는 없어서 아직도 많이 힘든 일이 남아있다. 이 물리치료를 위해 언제까지 입원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10월에도 또 얼마나 입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상황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이상, 내 몸은 공포로 또 나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고, 나는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가. 뭐, 그 이전에 20년 동안 쌓인 그 공포가,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진 불신과 공포라는 감정이 쉽게 나아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현재 진행형이다. 매일 자기 전에 '내일도 오늘 같은 조용한 하루가, 좋은 하루가 될 수 있기를'이라고 두 손을 모으고 비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내가 블로그로 10월에 수술한 뒤에 지불해야 할 비용을 모두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난번 수술비도 갑작스럽게 생긴 사고로 생긴 비용이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큰 고통을 감당하시고 캐피탈에서 큰 대출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그저 블로그밖에 할 수 없는 나이지만, 블로그를 통해 도움을 조금 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 나는 이렇게 사람이 되지 못한 걸까. 내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하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책에서도, 강연에서도 어렵다면… 도움의 손을 구하는 걸 망설이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과연 그 정도의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어 왔던 것일까…?


 모르겠다. 병실 1610호 탈출처럼 이 트라우마에서 언제 탈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하루가 무사히 넘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아직 살고 싶다. 이전에는 죽지 못해 사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살고 싶다. 살아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너무 많다. 나는… 정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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