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고전을 통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 시사/학교와 교육
- 2012. 4. 28. 07:28
아이들에게 고전을 통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아이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게 하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독서교육을 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그저 인터넷 서점에서 파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책들을 선택하여 아무런 검증 없이 아이들에게 권해주고는 한다.
이 같은 행동은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아이가 책을 읽는 것에 흥미를 읽어버릴 수도 있다.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있는 것은 '좋은 책'이라는 뜻이 아니라, '많이 팔린 책'이라는 뜻이다. 책의 판매 여부는 그 출판사의 마케팅과 해당 서점의 마케팅 전략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다. 즉, 단기간에 갑자기 많이 팔렸다고 하여 무조건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좋은 책은 장기간에 걸쳐서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꾸준히 계속해서 그 판매가 이뤄지는 책이다.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란에 올라있는 책 중 대부분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람들에게 잊혀진다. 하지만 진짜 좋은 책을 그 이후로도 계속 사람들이 찾아 읽게 되고, 그 책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인식되어있다.
그렇다면, 대표적으로 어떤 책이 그런 책일까?
그것은 바로 '고전'이다. 고전이라고 하여 무조건 케케묵은 옛날 책이 아니다. 이전에 나는 '논어가 교육의 지표로서 합당한 이유'라는 글을 통해서 한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 같은 고전이 정말 좋은 책인 이유는, 그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그러한 고전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와 같은 고전을 아이들과 부모가 읽도록 하면, 교육적으로 아주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일단, 무엇보다도 고전을 읽는 아이들은 생각이 깊어지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올바른 인성을 기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올바른 가르침을 받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그 격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고전을 어렵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전'이라는 말 자체가 들으면 왠지 어렵고, 재미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고정관념이 자리를 잡은 이유는, 우리가 학교에서 어릴 때 받았던 독서교육에서 재미없는 책들을 억지로 읽게 하고, 억지로 장문의 글을 쓰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고전에 대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고전은 '재미없기만 하고 읽을 필요(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런 어려움을 느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권의 책을 권하고 싶다. 그 책은 '리딩멘토 이지성과 인문학자 황광우의 생각경영 프로젝트 고전혁명'이라는 책이다. 줄여서 그냥 '고전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
고전혁명, ⓒ노지
위 책을 읽음으로써, 왜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고전을 읽음으로써 얼마나 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있으며, 왜 아이에게 고전을 읽게 하는 교육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지나칠 수도 있으나, 정말로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다. 위 책에서 실제로 교육현장에 고전을 적용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이뤄낸 한 사례가 적혀있었다. 그 사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97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허버트 브라운, 199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게리 베커, 미국의 유명수학자 조지 버코프,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답은 모두 시카고대학 출신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카고대학에서는 85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44명의 로즈장학생(로즈장학제도는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장학제도로, 엘리트 코스로도 정평이 나 있다)을 배출했다. 오늘날 명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사실 초창기 시카고대는 그저 그런 학교 중 하나였다. 그런데 1929년 30세의 허친스가 제5대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열등감과 패배감에 물들어 있는 학생들을 보고 허친스는 새로운 계획을 도입한다. 일명 시카고 플랜이라고 불리는 '그레이트북 프로그램(The great book program)'이 그것이다. 허친스는 학생들에게 졸업할 때까지 백 권의 고전을 읽게 했다. 단지 읽기만 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전을 읽으면서 세 가지 목표를 충족하도록 주문했다. 첫 번째는 고전에서 자신만의 롤모델을 발견하라는 것, 두 번째는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갈 가치를 찾으라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이 발견한 가치에 꿈을 품으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버드대나 예일대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던 학생들이 고전을 통해 가치와 꿈을 가지게 됐고 열정을 회복했다. 85명의 노벨상 수상자 배출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은 학생들의 꿈과 열정이 빚어낸 쾌거였던 셈이다. 미국에서 가장 지적인 대학으로 꼽히는 리드·뉴·말보로·세인트존스대학에서는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보다 더 많은 학자와 저명인사를 배출했다. 이 네 대학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인문고전이다. 특히 세인트존스대학은 전공과목이나 교양강좌가 아예 없으며, 백 권의 고전 토론이 대학 사 년 커리큘럼의 전부다.
위 사례가 놀랍지 않은가? 고전이 읽은 학생들이 겪게 된 변화는 참으로 놀라웠다. 실제 통계학적으로도 그냥 소설을 읽는 학생들보다 인문학과 고전을 위주로 읽는 학생들이 보다 후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결과가 있었다. 즉, 아이들에게 고전을 통한 교육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가 있는지는 이미 검증이 끝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교육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지난 우리가 겪었던 슬픈 역사에서도 '고전'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녔었는지를 사례를 통해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잠시 책에서 언급되어있는 또 하나의 예를 언급하자면 아래와 같다.
일제는 네 차례에 걸쳐 '조선교육령' 을 개정·공포한다. 1911년 8월 전문 30조로 이뤄진 제1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됐다. 그 목적은 너무나 분명했다. 식민지가 된 우리 민족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사립학교 등의 학교 편제가 마련됐다. 그런데 대학이 없었다. 더구나 교육내용도 일본어를 보급하기 위한 보통교육, 농·상·공업 분야의 하급 직업인을 만들기 위한 실업교육,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교육에 한정돼 있었다. 일제가 일본어를 가르친 것은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함이자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일꾼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기술과 실업만을 가르치게 한 것은 그저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일제에게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충실한 노예를 육성하는 제도에 불과했던 셈이다. 조선교육령으로 성균관이 폐지됐고 전국의 서당이 사라졌다. 서당에서 고전을 가르치면 칼을 찬 순사가 나타나 잡아갔다. 그리고 "조선이 고전을 읽다가 망했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졌다. 동양의 고전은 조선을 망친 원흉이 됐고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공자와 맹자를 읽던 아이들은 보통학교에서 생활에 필요한 지식만을 얻어야 했다.
일제는 왜 고전을 읽지 못하게 했을까? 그것은 근본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맨큐의 경제학'의 근본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있다.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사고의 기반에는 동양의 고전이 자리 잡고 있다. 고전을 읽지 못하게 한 데는 생각 자체를 가로막겠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의식을 잠재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 내가 왜 지배를 받고 있는지, 이것이 왜 부당한 것인지에 대해 아예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저 '나는 이렇게 태어났으니 이렇게 사는 수밖에 없구나!' 하며 운명과 시절만을 탓하게 하면, 저항은 생겨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 대학생(20대)들이 그토록 정치에 무관심하고, 참여가 적은 것은 획일화된 교육이 수동적인 사람으로서 성장시켰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언제나 시키는 대로만 하도록 강요받고 있고, 그러한 것을 거스르면 언제나 제재를 받으면서 가르침(교육)을 받아 왔다. 그 같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길 바라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세책례, ⓒKBS 캡쳐
교육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친구를 괴롭히고, 나는 제재를 당하지 않을까?' 나 '어떻게 하면 친구를 이기고, 내가 더 좋은 성적을 거둬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부모님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구나.' 등의 가르침이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올바른 사람의 도리를 가진 성인으로 성장하여, 대학생 혹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길을 똑바로 갈 수 있다. 도서관에 앉아서 어른들이 요구하는 허황한 스펙쌓기에 열중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의 꿈에 필요한 경험을 쌓는 것에 매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워렛 버핏의 다른 말 중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한 배움에 있어 고전을 읽는 일만 한 것이 또 있으랴.
이 같은 교육에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에는 옛 조상의 철학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우리 자신이 더욱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고전을 읽게 하는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고전이 교육의 중심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고전'이라는 것이 '재미없다.'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깃들여 있는 것임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전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이 책 '고전혁명'에 언급된 하나의 글을 남긴다. 아래의 글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왜 아이들에게 고전을 통한 교육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회를 보는 눈, 정말 누구의 잘못인지 밝힐 수 있는 판단, 그것을 키우기 위해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 나만의 프레임으로 고전을 해석해 삶에 적용해야 한다. 고전은 위가 아니라 우리의 것이 돼야 한다. 고전은 자신의 권리를 찾는 시작이다. 경제위기가 터질 때마다 가계가 휘청하고, 사회가 흔들리면 나의 안위도 불안해지는 삶이란 얼마나 고단한가. 시대의 판도를 알지 못하면 미리 대비할 수 없고, 내 두 발로 우뚝 서지 않으면 작은 외풍에도 크게 흔들린다. 내 머리에 모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내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타인의 프레임이 나는 내 머리로 판단하고,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내 두 발로 우뚝 설 수 있는 삶을 위해, 우리는 고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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