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협상을 통해 본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원칙
- 문화/독서와 기록
- 2019. 5. 23. 07:35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나 혹은 타인과 협상을 하게 된다. 영화 <협상>에서 등장해 살벌한 분위기로 서로가 얻고자 하는 협상에 매달리는 손예진과 현빈과 달리, 우리는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이익을 손에 넣기 위해서 협상을 벌인다. 그 협상에서 우리는 때때로 이기고 하고, 지기도 한다.
우리가 협상을 하는 이유는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뭔가 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거창해 보이지만, 이 말은 사실 너무나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말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사려고 고민을 하는 이유는 ‘이 물건이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이 물건이 있으면 폼 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가 많다.
결국, 그 이유는 더 나은 나를 위한 내일, 즉, 미래에 투자하는 일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지 말지 고민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협상은 나아가 곧 다가오는 총선에서도 ‘투표’라는 행위를 하기 전에 끊임없이 후보와 정당을 저울질한다.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고 이익이 되는지 고민한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는 일이 바로 ‘협상’인 거다. 우리는 이렇게 협상을 통해서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을 행사해 왔고, 우리는 시장경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소비를 하면서 나를 위한 투자를 해왔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 사회, 정치는 그러한 협상이 쌓이고 쌓인 결과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정치가 돌아가는 걸 보면 좀처럼 그 협상이라는 게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황교안과 나경원을 필두로 한 제1야당 자유한국당이 국회 밖만 돌아다니면서 국회 기능을 마비시킨 탓에 정치가 꽉꽉 막혀 있다. 아무래 대화와 타협을 하자고 여당이 목을 매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렇게 버티는 이유는 국회가 자기 역할을 하면서 문재인 대통령, 혹은 여당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로 인한 이익보다 장외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한사코 국회가 아니라 바깥에서 지지부진하게 맴돌고 있는 거다.
어떻게 보면 ‘꼼수’다. 원칙 중심의 협상으로 자신들의 손에 얻을 수 있는 게 없으니, 꼼수를 부리면서 장외전으로 나아가 불필요한 갈등을 부추겨 상황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거다. 과연 그들의 꼼수가 제대로 먹힐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대외명분으로 여기는 태극기 부대가 시끄러운 건 확실하다.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로 테이블에 앉을 준비를 해야 한다. 피셔는 협상에 성공하기 위한 네 가지 원칙으로 ‘사람과 문제를 분리시킨다’, ‘협상의 목적, 즉 이익에 초점을 맞춰라’, ‘상호 이익이 되는 옵션을 개발하라’, ‘최선의 대안을 통해 협상력을 키워라’라고 말한다.
피셔가 말하는 협상의 네 가지 원칙은 우리가 협상을 원활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원칙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마찰을 겪는 정치를 보면 이 네 가지 원칙을 지키는 협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사람과 문제를 분리시켜서 보는 일은 너무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통을 겪는 사회 문제와 정치 문제에는 사람이 깊숙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모든 정치적 사안에서 시민과 정부가 충돌하고, 정부와 국회, 국회와 시민이 충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사람들의 권위주의적 의식, 그리고 장기적인 협상보다 일회성 협상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덕분에 협상안이 제대로 만들어질 낌새조차 없다.
<대통령의 협상>이라는 책의 저자가 말하는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우리 사회의 장년층에서 선호하는 이른바 ‘화합과 질서’는 겉으로는 마치 상호 협력하는 바람직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명하복’이라는 위계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이런 관계는 자연 상태와는 동떨어진 작위적인 것이다. 이런 수직적인 사회에서는 협상 자체가 불필요하다. 윗사람은 정하고 아랫사람은 따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문화에선 명령과 통제만 존재한다. 사농공상의 위계적 계급이 존재했던 조선 시대, 우리 국민을 2등 신민으로 구분했던 일제 강점기, 그리고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갈등을 사회적인 악으로 간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의 상명하복 문화를 우리 학교에 정착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다. 그 영향으로 우리 국민 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갈등이 없는 사회가 이상적이고 바람직하다는 편견을 은연 중에 지니고 있다. (본문 177)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한국 시민 사회의 성장을 막는 장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절반을 담당하는 중장년층은 여전히 권위주의 문화를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누구나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한 가지 사안을 두고 벌이는 대화와 타협을 불필요한 갈등으로 여기는 거다.
그들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대를 가리켜 엉망진창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 정부 시대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 민주주의가 만개했던 시기다. 검사와 대통령이 함께 앉아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대통령이 경호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민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문화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서 열린 새로운 시대라 가능했다.
문화적 민주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야당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던 반민주적인 권위주의적 문화와 싸워야만 했다. 그 싸움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구 언론 세력, 여야 할 것 없는 수구 정치 세력들을 홀로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고독한 싸움을 해야 했다.
<대통령의 협상>의 저자는 아래와 같이 풀어낸다.
독재 정부에서는 숨죽이며 비판의 예봉을 꺾었던 언론이 만주 정부에서는 언론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국정을 사사건건 왜곡하고 의도적 오보까지 내면서 저주의 굿판을 벌이니 국민에겐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갈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데다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일사분란한 집단주의에 익숙해진 우리 국민으로서는 노무현 정부하에서의 갈등이 힘들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게 당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노무현 대통령이 갈등을 부추겼다는 오해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에서 갈등이 폭발했던 건 그만큼 노 대통령이 민주적인 대통령이었다는 증거다. 갈등은 민주주의에서만 피어나는 꽃과 같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갈등 없이 한마음인 북한을 비난하는 것도 같은 이유 아니겠는가. (본문 181)
나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가 말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고 우리 시민 사회는 그 시절에 겪은 자유를 다시 빼앗으려고 하는 보수 정부에 조금씩 저항 의식을 키웠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 사건에 강한 비판을 가할 수 있었던 시민이 될 수 있었다.
<대통령의 협상> 저자는 진정한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갈등의 당사자들이 모두가 성찰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얼마나 성찰하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을까, 과연 얼마나 성찰하는 시민으로서 정치에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을까, 과연 얼마나 심각하게 투표를 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 한 번쯤 던져 볼 만하다. 민주적인 대통령을 만만하게 보고 걸핏하면 폭력 시위도 마다치 않던 세력이 폭압적인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라 평화적인 시위도 제대로 못 했는지를 곱씹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원칙을 중시하며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대화와 타협을 일절 거부한 야당과 마찰을 겪으며 좀처럼 무엇하나 해볼 수 없었고, 여당마저 기득권 세력을 지키기 위해 등을 돌리는 사태가 잦았다.
그럼에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협상 원칙으로 내세운 대화와 타협을 퇴임 후에도 끝까지 이어갔고, 우리 사회는 SNS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 겨우 대화와 타협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세대를 맞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겪은 모난 시절이 만든 원칙은 비로소 오늘날 시민 사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성공한 대통령이 아닌, 국민이 성공하는 나라를 꿈꿨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라던 세상.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친구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 나라는 다시금 그 시절과 똑같이 기득권 수구 세력이 대통령과 정치, 시민을 변함없이 뒤흔들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앞으로가 진짜 중요하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일제 독재에서 내려온 ‘상명하복’이라는 권위주의적인 정치가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시민과 정부가 동등한 선에서 협상을 벌이는 정치다. 지금 이렇게 갈등이 빈번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조용한 세력이 다시금 입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통령의 협상>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갈등이 없는 조직은 고여 있는 물과 같다. 흐르는 물은 바위의 표족한 모서리를 다듬기도 하고 오물을 쓸어가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는 혁신 경제를 지향하고 있다. 갈등 없이 혁신은 불가능하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대안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와 청와대가 건강한 갈등을 통해 보다 혁신적으로 나아가길 기대해본다. (본문 255)
저자의 이 말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대통령의 협상>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던 원칙을 지키는 바람직한 협상의 원칙, 그리고 너무나 이른 시대에 그 원칙을 지키려다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책 <대통령의 협상>이었다.
부디, 오늘날 뒤늦게 찾아온 노무현의 시대에 어떤 협상의 정치가 필요한지 궁금한 사람에게 이 책 <대통령의 협상>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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