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박스,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와 여자가 알아야 할 것들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여성들을 함부로 대하는 소위 나쁜 남성과 다른 선한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만 아니라 이 글을 읽을 많은 남성도 자신은 절대 여성을 강간하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차별하는 나쁜 남성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을 거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맨박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나는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길을 가다 가슴 혹은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치는 그런 행위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평소 가진 남성과 여성 문제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맨박스>라는 책은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이 어떤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지 말한다. 책을 읽는 내내  ‘과연 나는 저자가 던진 질문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며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그탓에 책을 읽는 시간이 너무나 불편했고, 살짝 머쓱한 기분으로 잠시 책을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솔직히 말해서 남자다움에 갇힌 사람들은 <맨박스>의 저자 토니 포터(남성이다.)가 하는 말이 남성이 하는 말이 아니라 여성이 하는 말이라면, 열의 아홉은 ‘어디서 여자가 남자에게  시비를 걸고 있어 ?’라며 책을 덮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맨박스>의 저자가 하는 말은 날카로웠다.


 저자는 책의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이 바라는 목표는 남성들이 맨박스 안에서의 삶이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남성들이 맨박스 밖으로만 나와야만 성평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196)


난 이 책에 담긴 정보와 관점이 남성 관련 이슈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책임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본문 199)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 밝힌 이 목표는 <맨박스>라는 책을 다 읽었을 때 어느 정도 나에게 실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당연한 남성성’이라는 문제를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그러한 남성성을 어떻게 우리 사회가 극복해나가야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는 건 복잡하지 않고 굉장히 단순할 뿐더러, 우리가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가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남성의 ‘잘못된 남자다움’은 우리가 어렸을 때(특히 가부장적인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더) 몇 번이나 겪었고, 어쩌면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남자로 살아가면서 듣는 가장 흔한 말 중 하나는 “여자 애처럼 울지 마라. 남자가 뭘 질질 짜고 있노?”라는 말이다. 울지 않아야 사나이라고 말하는 어른들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다움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고, 여자는 그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느낀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남자다운 건 어떠해야 한다고 배운 남성들은 점차 자신도 모르게 남자다움이라는 이름의 맨박스에 갇히고 만다. 우리는 좁은 맨박스 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채, “하여간, 여자들이란!”이라며 여성을 비판하거나 혹은 “남자 녀석이 여자처럼 왜 그래?”라며 남성을 비판한다.


 이러한 남자다움은 조직을 이루는 단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특히, 나처럼 남중 남고를 졸업한 사람들은 그 시절에 겪은 남자다움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는지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당시 남학교에서 잘 울거나 예민한 애는 계급이 최하위고, 운동을 하거나 거친 애는 계급이 최상위였다.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성적인 관심을 당당히 드러내는 일은 상위 계급에 있는 녀석들이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남자들이 속한 조직 내에서 여자에게 성적인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건 자진해서 최하위 계급으로 내려가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음담패설이 나오기도 했다.


 <맨박스>의 저자 또한 어릴 적에 그런 경험이 있다며 털어놓으면서, 우리가 어릴 적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남성다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하지만 당시의 난 그것 또한 정답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나처럼 진짜 남자다운 남자가 되고자 하는 (또는 이미 진짜 남자가 된 양 행동하던) 소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진짜 남자는 섹스를 사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남자라면 늘 섹스를 원하고 절대 사양하거나 거절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남자라면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섹스할 기회를 반겨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남성성에 큰 의심이 따라붙었다. (본문 38)


 결국, 어릴 적 그 시절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어도, 조직 단위로 움직이는 단체 생활에서 남성다움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었던 거다. 여전히 지금도 잘못된 남자다움의 맨박스에 갇혀서 ‘섹스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는 건 남자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남자가 우리 주변에서는 적지 않을 거다.


 지나치게 극우적인 남자들을 메인으로 콘텐츠가 올라온다고 하는 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남자다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성들을 성적으로 희회화하고, 다른 사람을 폄하하면서 ‘나는 저런 녀석들과 달라. 엄청 남자다운 남자야!’라며 자신이 가진 절대적으로 낮은 자존감을 채우고 있다.


 아직도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아 큰 논란이 되고 있는 가수 승리, 정준영을 비롯한 몇 명의 유명한 남자 연예인들이 속한 단체 카톡방에서 일어난 일과 버닝썬 클럽에서 일어난 성매수 및 성폭행 사건들. 그 모든 것들은 그들 사이에서 ‘남자다움’으로 통하면서 ‘안 하면 남자도 아니지!’이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례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남자다움에 대해 잘못된 시선을 갖고 있다. <맨박스>라는 책은 우리가 그런 악질적인 남성과 다른 선한 남성이라도, 우리도 은연 중에 그들의 행동에 침묵으로 묵인하며 그런 일이 일어난 구조적 성차별에 동의하고 있다는 걸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래서 <맨박스>라는 책을 읽는 시간은 불편했고,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렇지 않아.’라며 변명을 하고 싶어도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저자가 말한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해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책에서 여러 사례와 질문으로 독자 스스로 묻게 한다.


 그중 한 가지 사례와 질문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칼의 이야기 :


저는 우리 사회의 묵인에 몹시 화가 납니다. 남자로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참여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폭력을 쓴 남성들을 작정하고 풀어주는 사법 체계에도 이의를 제기해야 합니다. 남성들은 여성 폭력을 멈추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착한 남자들이 폭력적인 남자보다 훨씬 많죠. 우리가 뭉치면 폭력적인 남자보다 한 수 앞설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남성들은 폭력을 쓰고도 책임지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죠. 우리 같은 착한 남성들이 침묵을 지키고 자기 일에만 신경 쓸 테니까요. 폭력적인 남성들이 꽤 약삭빠르단 걸 인정해야하겠습니다. 그들은 다른 남자들이 어디까지 묵인할지 파악하고 공분을 사기 직전까지만 행동하거든요.

폭력적인 남성들은 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자행합니다. 남들 앞에서 실수로 폭력을 쓴다 해도 뺨 한대 때리는 정도에서 멈추죠. 구경꾼들이 바로 개입하기에는 모호한 수준의 학대 행위에서 멈춘다는 겁니다. 저는 그들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면 결혼할 여자를 찾는 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가해자들은 의심없이 다가온 여성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조종합니다. 그리고 나서 닫힌 문 뒤에서 그녀를 때리기 시작하죠. 공공장소에서 하면 안 될 짓인 걸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자면 사적 공간에서의 폭력 행위는 허락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남성들의 대다수는 폭력 남성들이 사적 공간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저 내 일이 아니라고 치부해버릴 뿐이죠. 우리가 모두 아는 표현대로 “집안일은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죠.


저자. 칼은 여성 폭력에 대해 격분하며 현재 상황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내렸다. 그는 단순히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남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들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자각하고 있다. 굉장한 통찰력이며 그의 분노를 이해할 만하다.


Q. 당신은 여성을 학대하는 남성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여성 학대에는 부적절한 발언이나 농담도 포함됩니다. 보통 그들에게 이의를 제기합니까? 동의하는 발언을 합니까? 혹은 침묵합니까?


Q. 여성을 학대하는 발언이나 폭력에 대해 침묵으로써 남성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본문 111)


 조금 긴 글이 되었지만, 윗글에서 읽을 수 있는 칼의 이야기와 저자가 한 정리, 그리고 마지막에 던진 질문은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내가 유독 이 글에 눈이 간 이유 중 하나는 어릴 적에 겪었던 가정 폭력 사건 때문이다. 우리 집은 윗글의 사례의 폭력적인 남자를 아버지로 두고 있었다.


 어머니가 너무 심한 폭력을 당할 때 어쩔 줄 몰라서 옆 라인에 사는 친척 분께 도움을 청한 적이 있다. 그런데 돌아온 말은 ‘그건 타인이 개입할 수 없는 집 안의 일이고, 엄마와 아빠의 일이다. 너희들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축적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너무 심각하다고 판단해 내가 경찰에 신고했을 때도 비슷하게 상황이 끝나고 말았다. 결국, 나는 남자다움의 맨박스에 갇혀서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 하지 못했던 거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그때의 일을 잘못한 판단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잘못되어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지금은 어머니가 이혼을 하셨지만, 문제는 여전히 가해자와 주변 방관자들은 그때와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많이 변했다고 말하지만, 뿌리 깊게 내린 권위주의적 사고 방식에 갇힌 남자다움은 남성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잘못된 성 차별 의식 속에 갇혀서 지내게 한다.



 <맨박스>라는 책은 그렇게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서, 어릴 때부터 ‘잘못’으로 한 번도 지적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잘못된 남자다움을 마주하게 해준다. 이 책은 남성을 메인 타겟으로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잘못된 남자다움에 어울리기 위한 잘못된 여자다움을 가진 여성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책의 저자는 우리를 향해 페미니스트라고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단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인식을 돌아보라는 당부를 책에 담고 있으며, “난 이 책에 담긴 정보와 관점이 남성 관련 이슈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책임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정리하며 단지 바랄 뿐이다.


 평범한 남성으로 길러져, 평범한 남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남성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아니,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평범한 여성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현재 남자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아버지)의 일을 짊어지고 있다면, <맨박스>는 앞으로 남자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 좋은 참고서가 되리라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TED 강의를 영상으로 남긴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0)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