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갈하이 4회의 질문, 정의는 어디에 있나
- 문화/문화와 방송
- 2019. 2. 18. 07:30
드라마 <SKY 캐슬>이 끝나고 방송 중인 드라마 <리갈하이>는 일본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일본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한사코 ‘실망했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드라마 <SKY 캐슬>가 보여준 시청률의 절반도 보여주지 못하는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나로서도 드라마 <리갈하이>를 보면서 매회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는 그런 두근두근한 긴장감은 느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지나치게 직설적인 남자 주인공 고태림과 지나치게 어리숙한 여자주인공 서재인이 살짝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공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해야 할까?
드라마를 보면서 솔직히 고태림이 주장하는 의견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토를 달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고태림이 추구하는 방식이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지나치게 이상적인 정의론을 내세우는 서재인이 추구하는 방식은 ‘드라마’라서 가능한 덧없는 일장춘몽 같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드라마 <리갈하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살짝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서재인이라는 캐릭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포기해버린 이상적인 정의론을 추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위태위태하면서도 응원해보고 싶은 부분도 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그녀가 추구하는 건 굉장히 위험했다.
그녀는 이미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아보기 전부터 ‘결론’을 내려놓고, 마치 변호사가 아니라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듯한 만화 속 주인공 같은 판단을 했다. 고태림이 갑작스레 물은 “버스에서 여자 엉덩이를 만졌다고 하는 사람을 변호할 건가?”라는 질문에 곧바로 “싫어요.” 했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서재인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전부터 이미 스스로 판단을 해버린 거다. ‘저 녀석은 버스에서 여자 엉덩이를 만진 쓰레기 같은 남성.’이라고 말이다. 물론, 여자로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도 비슷하다.
하지만 ‘과연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자세히 진상을 파악해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적지 않다. 사람의 편견이라는 건 그래서 무섭다. 무심코 자신이 정의라고 말하는 일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일이라면, 당당히 “이게 정의고, 그건 불의야!”라고 말하는 걸 조심해야 한다.
이수역 폭행 사건만 보아도 그렇다. 처음에는 여성들의 일반 주장만 퍼나르면서 자칭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을 일방적으로 비난했다. 그런데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잘못된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런 오류에 빠진다. 심지어 한국의 페미니즘을 외치는 사람들은 ‘이번이 조금 특이했을 뿐이야!’라며 한사코 판단의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극단적이고, 지지를 받지 못하는 거다.
드라마 <리갈하이>에서 볼 수 있는 서재인 변호사라는 캐릭터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결론짓고, 너무나 쉽게 자신의 줏대로 사건을 판단하면서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가’라고 묻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정의는 이상은 있어도 실체가 없었다.
지난 드라마 <리갈하이 4회>에서는 서재인 변호사가 가진 그런 이상이 고태림이 보여준 직관과 현실에 무너지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고태림이 법정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물밑 작전을 펼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범죄자를 처벌하고 싶고, 자신의 정의를 주장하고 싶으면 변호인이 아니라 정치인, 혹은 검사가 되어 주장하는 수밖에 없다. 변호인의 이상은 분명히 서재인 변호사가 가진 말랑말랑한 정의론처럼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할까?
드라마 <리갈하이>는 고태림이라는 인물을 통해 정의를 일방적으로 결정 짓고, 한쪽 면밖에 보지 않았던 사람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다. 서재인의 주장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내심 서재인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게 정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서재인보다 고태림 쪽으로 더 기울고 싶다.
결국, 세상에 정의는 이긴 자가 주장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 물론, 역사적으로 증명된 과오를 ‘부정의다!’라고 주장하는 자유한국당 김진태 같은 쓰레기도 있지만, 그런 인물은 ‘미친 녀석’으로 논외로 치부해도 좋을 것 같다. 언제나 우리 인간 세상은 그렇게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살아가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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