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박에 조선사로 쉽게 이해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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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한글을 한자의 대체재로 만들지 않았다


 역사를 배우는 일은 우리에게 암기를 하는 일로 여겨졌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역사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사건이 몇 년도에 일어났고, 어떤 제도가 어느 시대에 최초로 시행을 했는지 외우면서 역사를 공부했다. 덕분에 우리는 세월이 지나서 기억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익숙한 이름과 사건들뿐이다.


 가령 조선사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조선사에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차지했으며, 세종대왕이 한글을 최초로 만들었고, 더 나아가 이순신 장군이 일본을 상대로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해야만 했고, 왜 고려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나라 조선이 탄생해야 했고,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무엇을 했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배경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이유와 배경에 대해 알거나 이해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역사 수업은 ‘문제를 풀어서 답을 찍으면 된다.’는 역사라 이해는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정확히 외운 뒤에 ‘오답’을 걸러낼 수 있으면 충분했다.


 이러한 공부는 대체로 조선사 왕조실록을 통해 기록된 큰 사건의 원인과 결과만 암기했을 뿐으로, 우리가 똑바로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단박에 조선사>의 저자 심용환은 들어가는 말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왕조실록을 통해 본 세계는 매번 모든 것이 반복될 뿐이고, 쓸모없는 암투와 하찮은 인물들의 어리석은 짓만이 인상적으로 남겨지죠. 아니면 세종, 성종, 영조, 정조 같은 위대한 군주의 영웅 놀이를 지켜보며 감격하는 수준 정도이겠고요.

관점이 바뀔 때 재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독해 방식이 바뀌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단박에 조선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본문 6)


 저자 심용환은 <단박에 조선사>를 집필할 때 ‘문장은 쉽게, 내용은 풍부하게’라는 원칙을 기본으로 삼아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전한다. 단순히 어떤 왕조에서 왕이 세운 업적과 치명적인 잘못으로 생겨난 문제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독자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방향으로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단박에 조선사>를 펼치면 제일 먼저 읽을 수 있는 건 고려 말기 공민왕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태동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보통 우리가 아는 객관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원나라가 명나라에 흔들리고, 고려의 신진사대부가 신흥 세력으로 올랐다.’ 정도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면 미처 우리가 교과서에서 읽지 못한 ‘역사에서 새로 나온 가설’도 적혀 있다. 그중 놀랐던 건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퇴를 거듭한 이유에 ‘흑사병’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흑사병을 비롯한 각종 역병으로 재정 파탄에 이르렀다는 지적도 있어요. 보통 흑사병 하면 유럽에서의 어마어마한 참극을 떠올리지만 중국도 그에 못지 않아요. 1331년 히말라야에서 흑사병이 전파돼 135 0년대까지 각종 역병이 창궐했거든요. 이로 인한 인명 손실과 재정 부족이 원나라가 멸망한 원인이었다는 거죠. 무능한 황제의 등장, 불완전한 정치, 라마교 행사로 인한 무리한 재정 지출, 게다가 이 복잡한 상황을 그저 ‘교초의 남발’, 즉, 화폐를 마구 찍어내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던 무책임안 태도가 겹치면서 사회는 근본적인 위기로 치닫게 됩니다. (본문 17)


 단순한 ‘지적이 있다’라는 말이지만, 그래도 중국에서 흑사병을 비롯한 전염병이 돌면서 나라 한 개를 통째로 위기로 빠뜨린 건 명백한 사실이다. 흑사병은 유럽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며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까지 심어준 재앙이었다. 그런 병이 중국에서 발발해 원나라 쇠퇴에 영향을 준 거다.


 이런 이야기는 교과서라는 좁은 창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원나라의 쇠퇴와 한족의 세력 확정이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고, 격변기를 겪는 고려도 나라의 막을 내리면서 조선 건국으로 이어진다는 결과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단박에 한국사>는 이러한 새로운 각도에서 역사를 볼 수 있었다.


 가령 <단박에 한국사> 저자 심용환이 덧붙인 해석으로 조선 건국을 살펴보자.


흥미로운 점은 조선의 건국이 역성혁명의 과정을 그대로 밟았다는 거예요. …(중략)… 정도전은 바로 그 맹자가 강조한 역성혁명 사상을 받아들여서 문자 그대로 ‘왕씨의 나라’를 ‘이씨의 나라’로 바꾸려고 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민본국가를 만들려고 한 거죠. …(중략)

오늘날 유럽의 시민혁명을 배우고 사회계약론을 비롯하여 시민주권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서 조선의 역성혁명이 주는 감흥은 떨어질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파라오가 신이고 유럽에서는 왕권신수설이 근대 초까지 강조됐던 것을 고려하면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은 극히 선진적이죠. 그 혁명성을 구현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정도전과 혁명파의 도전은 극히 변혁적이며 창의적이라 할 수 있고요. (본문 37)


 조선 건국은 그동안 한 나라가 정치 사회적으로 몰락하며 무너진 나라를 대신해 세워진 나라가 아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판을 뒤집어 새로운 나라의 틀을 짜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의 결과라는 걸 이 해석을 통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 조선의 건국에 왜 혁명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동안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시선에서 역사를 바라보며 ‘역사적 사전’이 가진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게 <단박에 조선사>가 가진 매력이다. 본격적으로 조선사가 시작하는 조선 건국 편에서 이 정도의 이야기가 다루어지니, 본편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다루어질지 흥미진진했다.



 본편에서 다루어진 이야기 중 관심이 간 이야기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관련된 이야기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까막눈인 백성들을 위해서 양반들의 반대와 방해를 무릅쓰고, 힘겹게 한글을 만들어 널리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단박에 조선사>가 던지는 해설은 좀 놀랍다.


애초에 세종이 한자를 한글로 대체하려고 한 적은 없어요. 한자를 사용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두나 향찰 같이 한자의 음과 훈을 사용하여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는데, 이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문자가 등잔한 거죠. … (중략) 수만 자의 한자를 익힌 사람은 지극히 소수였어요. 하급 관료들조차 이두가 아니면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고, 백성은 대부분 까막눈이었어요. 여기에 여성들가지 고려한다면 한글듸 등장이 양반 관료에게 피해를 준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양반 관료들이 이해하는 데는 결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답니다. ‘남성-양반-관료’가 주도하며 ‘하급 관료-일반 백성-여성’이 이를 따르는 구조처럼 한자의 ‘보완재’로 한글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돼요. (본문 80)


 우리는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오로지 평민을 위해서 만든 문자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한글의 탄생 배경에는 조금 더 효율적으로 관료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정치계통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걸 윗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오로지 이타적인 이유로 만들었던 게 아닌 거다.


 물론, 결과적으로 한글이 훗날 공식 문자가 되어 한자를 대체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글과 한자는 함께 쓰이고 있다. 일본에 많은 영향을 받은 법조문은 지금도 한자가 가득하고, 오늘날에는 다시금 한자 교육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한글만 알아서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말도 나온다.


 이러한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우리는 ‘한글이 한자의 보완재로 만들어졌다.’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고, 한글로 조선 시대는 어떤 목표를 이루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단박에 조선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독자를 놀라게 한다.



 저자가 추가로 던진 질문은 ‘세종은 완벽하다?’라는 질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람에게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광화문 광장에 커다란 동상으로 세워져 있을 정도로 위대한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가 쉽게 배워서 쓰고 말할 수 있는 한글을 만들었고, 비록 일제 강점기를 겪었어도 훨씬 일찍 망할 수 있었던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지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박에 조선사>에서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증명하듯, 세종대왕이 가진 치명적인 문제에 대해서 과감히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세종은 노비 출신인 장영실을 기용해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다른 어떤 왕보다 평민인 백성과 문화 융성을 위해 노력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잘한 결과만 가지고 미화할 수 없는 치명적인 부분이 있었다.


세종의 통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부민고소금지법’입니다. 이 법은 지방 수령의 전횡을 백성이 고소할 수 없게 만든 법이죠. 이 법이 수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데도 세종은 분명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아요. (중략) 유교 윤리의 핵심은 ‘윗사람에 대한 복종’이잖아요. 지방에 파견된 수령은 왕의 대리인으로서 행정, 군사, 사법은 물론 도덕적 교화의 의무까지 지닌 존재인 만큼 그가 아무리 잘못했다 해도 백성이 윗사람을 고소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힘든 문제인 거죠.

이뿐이 아닙니다. 유교 윤리를 보급하는 과정이라는 것은 결국 여성을 규제하고 옥죄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삼강행실도’를 비롯하여 세종이 주도한 각종 사업이 이후 조선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확대 강화되면서 보다 강고한 가부장 사회, 남존여비 풍토를 만들어냈어요. (본문 86)


 세종은 분명히 문화를 발전시킨 성군으로 우리에게 남아있지만, 그가 해결하지 않은 ‘부민고소금지법’은 차마 성군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물론, 이 법이 당시 사회적으로 일반적인 통념이라 바로 잡는 일이 힘들었겠지만, 지나치게 유교 윤리를 강조하며 윗사람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 건 좋지 않았다.


 더욱이 세종이 주도한 ‘삼강행실도’를 비롯한 다양한 사업은 조선 시대에서 ‘남녀차별’을 강하게 만들어냈고, 그 차별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정서와 사회에 남아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저 윤리적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한 규율이 아니라 일종의 억압과 차별에 정당성을 준 일이었던 거다.


 과거 유럽에도 농노 제도가 존재한 것처럼 조선도 마찬가지로 노예 제도와 남존여비 제도가 존재한 걸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종이 ‘노비 출신인 장영실을 기용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과 달리 사실 그는 유교 윤리를 철저히 지키며 가부장 사회, 남존여비 풍토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었다.


 이렇게 달리 생각해보지 못한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역사를 알아가고, 조금 더 폭넓고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단박에 조선사>.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알지 못한 것을 배워가는 즐거움으로 책을 읽으면서 알지 못한 조선사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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