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보통 사람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다
- 문화/독서와 기록
- 2018. 2. 12. 08:00
숨 가쁘게 사는 오늘, 문득 누군가가 떠오르는 책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이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인지 알면서도 꼭 한 번 우리가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에서 스쳐 지나가듯 만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내가 일본 기타큐슈에 갈 때는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검은색 마스크를 하고, ‘KOREA’라는 이름이 붙은 가방을 든 한 그룹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그녀’로 지칭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선두 그룹은 놀랄 정도로 키가 컸다. 겉모습만 보고 운동하는 사람들이라고 지레짐작해야 했다.
조금 더 블로그 취재 정신을 발휘해 짧게라도 말을 걸어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녀들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만약 그녀들이 국가대표로 연습을 떠나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녀들’이 아니라 정확 한 팀 혹은 종목 선수로 그녀들을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다.
이렇게 내가 우연히 누군가와 마주치더라도 짧은 말 한마디라도 나누지 못한다면, 나는 그저 타인을 ‘그’와 ‘그녀’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가 사는 삶에는 그렇게 우리가 우연히 지나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있다. 나의 이야기 또한 타인에게는 ‘그의 이야기’다.
갑작스럽게 사람을 지칭하는 ‘그’와 ‘그녀’라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오늘 소개할 <숨>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어느 한 사람의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오로지 저자는 ‘그’ 혹은 ‘그녀’라는 3인칭을 통해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처음 <숨>을 읽을 때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혹은 ‘그녀’라는 지칭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무척 신기했다. 과거에 읽은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도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로 정하지 않은 상태로 ‘의사’, ‘의사 아내’, ‘검은 안경을 쓴 여인’ 등으로 묘사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름이라는 건 우리가 누군가를 인식하는 절대적 고유명사이다. 만약 이름이 없으면 우리는 특정 인물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건 현실에서 무척 불편한 일이지만, 소설의 세계에서는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추상적인 만큼 더 폭넓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은 이름은 없어도 직업이나 상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름을 사용해 독자들이 그 인물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 읽은 에세이 <숨> 또한 오로지 ‘그’와 ‘그녀’라는 지칭으로 사람을 대하며 우리가 어떤 편견 없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숨>이라는 책에 담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그’ 혹은 ‘그녀’를 통해 정말 한 번쯤은 들어보았거나 직접 겪어보았을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서 우리는 더 경계하지 않고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아래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그가 한 달에 보름을 근무하는 오피스텔은 비교적 커다랗고 평범한 건물이었다. 일 층의 경비실은 그 모양새가 차라리 안내 데스크에 더 가까웠다. 경비실 앞으로 까맣거나 하얗거나 누런 외국인들과 피곤에 절어 있는 직장인들이, 혼자 사는 노인과 택배 기사가, 배달 음식을 든 배달원이, 키가 크거나 조금 작은 사람들이, 끝없이 그를 지나쳤다.
예전에는 점심을 거를 만큼 바빴었는데 말이야. 거래처 사람을 만나서 회의도 해야 하고 급하게 처리할 일도 많았는데. 그리고 보면 그땐 나도 바로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를 때가 많았지.
표정 없이 사람들을 관찰하던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택배 보관 확인 서류에 날짜, 이름, 호수, 수량을 기계적으로 기입했다. 한 시간 후면 건물 내 순찰을 돌아야 하니까 빨리 서류를 정리하는 게 이로웠다. 또박또박 정자로 글씨를 쓰느라 종이와 맞닿은 손날이 매끈해졌다. 손바닥 끝에 생긴 굳은 살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해 보니, 회사에 가면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아들도 같은 위치에 굳은 살이 있었다. 늦게까지 일하고 있을 아들을 떠올리자 담배 생각이 절로 났다. 건물 내 금연. 빨간 동그라미와 작대기가 그려진 스티커만 없었어도 사는 게 조금 편했을 텐데. 그는 담배를 물고 서류 작성하는 상상을 하며 부지런히 펜을 놀렸다. (본문 66)
윗글을 읽으면서 당신은 누구를 머릿속에 떠올렸는가? 이야기 속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야기 속 ‘그’를 우리가 아는 가장 가까운 인물로 떠올리며 읽을 수 있다. 나는 우리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들을 무심코 떠올리고 말았다. 분명히 그 아저씨들 또한 그의 삶과 무척 닮았을 것이다.
예전에 신문을 통해 부장으로 근무하다 정년 퇴임을 하는 은퇴 세대가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경비원을 하기 위해서 경쟁을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과거엔 은퇴 세대가 되면 여유 있게 노후를 보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앞으로 살날이 적지 않은 그들은 다시 또 먹고살아야만 했다.
때때로 접하는 경비원 아저씨를 상대로 갑질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참 마음이 아프다. 분명 경비원 아저씨들도 한때는 갑질을 벌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 나가던 시기가 있었고, 갑질을 하는 사람들과 동년배의 자식이 있을 수도 있다. 왜 일부 사람들은 그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숨>을 통해 읽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그’의 이야기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고, 누구에게나 비슷한 법이다. 우리 주변에도 그와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
<숨>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도중 나는 여러 번 책 읽기를 멈췄다. 어떤 때는 아침에 책을 읽다가 다른 일을 해야 해서 멈췄고, 어떤 때는 화장실을 가느라 멈췄고, 어떤 때는 인스타그램에 공유하고 싶은 장면을 만나 멈췄고, 어떤 때는 가슴이 아려져 멈추었다. 그 이야기 중 하나가 아래의 글이다.
그거야 당연하죠. 학교에 있는 모든 시간이 억울하고 괴로웠어요. 따돌림을 당할 만큼 뭔가 크게 잘못한 일이 없었거든요. 학교에선 종일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틀어박혀 컴퓨터만 했어요. 밤마다 내일이 오지 않길 바랐어요. 눈을 뜨면 아예 없었던 일이 되거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알지 못하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거나,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세지거나, 갑작스레 이사를 가거나, 차라리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으면. 그런 상상들을 하면서. 사람들이 저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여기길 바라기도 했어요. 사실은 저를 괴롭히는 애보다 옆에서 방관하던 아이들의 시선이 더 무서웠거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심장 뛰는 게 느껴져요. 눈을 감고 안 좋은 생각만 하느라 잠도 못 자고 밤새 뒤척였죠. 내일이 걱정되고 불안하니까요. (본문 172)
여하튼 따돌림 당하는 일상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저만 빼고 서로 친한 척 하는 모습들이 역겨워져요. 뻔히 나쁜 짓인 줄 알면서 애써 모른 척하고, 자기는 가담하지 않았으니 착한 사람이라고 위안하고.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봐 위선이나 떨고.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인간 혐오라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생겼어요. 누군가를 만나는 게 싫어졌죠. 분명 저 살마도 가면을 쓰고 있을 거야. 누군가의 불행을 모른 척 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나쁜 짓에 가담했거나 주동자일지도 모르지. 하는 생각으로 눈치를 보다가 조금만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멀리하고. (본문 173)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책의 저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언제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윗글의 이야기를 하는 ‘그’는 마치 지난 시절의 나와 같아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며 젖은 눈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시절, 정말 식칼이라도 몰래 가져가서 그 녀석을 찌르고 싶었던 시절, 인간 혐오에 쌓여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던 시절.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아니,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도 그러니까.
이 부분의 글을 읽다 보면 이런 글이 이어진다.
‘저를 괴롭히던 애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잖아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이제는 성인이라 괴로웠던 과거가 또다시 반복될 리 없을 텐데, 왜 저는 자꾸만 그 애의 이름이 생각날까요? 왜 세상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고, 가해자는 한때의 추억인 듯 잊고 살 수 있는 걸까요. 어째서 괴롭힘당한 사람이 그 사실을 부끄러운 과거라는 듯이 숨겨야 하는 걸까요.’
나도 아직 나를 지독하게 괴롭힌 중학교 시절의 이름을 떠올릴 때가 있다. 아무리 싫더라도 불쑥 머릿속에 나타나 그 녀석이 나를 때리던 시절이 떠오르고, 나는 그때마다 무심코 ‘개새끼, 죽여버릴 거야.’라고 낮게 중얼거린다. 트라우마는 자신이 이겨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일이 결단코 쉽지 않았다.
그 녀석은 아직도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같이 달려와 나를 때리며 티끌 하나 잘못한 게 없다는 듯이 웃었던 그 녀석을 나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했다. 아니, 용서할 생각이 없다. 혜민 스님은 분노를 바깥으로 보내라고 하지만, 이것만은 잘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잊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살다 보면 괴로운 기억을 덧칠할 수 있는 좋은 기억이 생기기 마련이고, 괴로운 기억은 잊고 지내는 게 오늘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책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을 통해 만나는 다양한 이야기로 나는 닫힌 나에게 스스로 말을 거는 거다.
오늘도 나는 <숨>이라는 책을 통해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었고, 그 누군가의 이야기는 다시 나의 이야기로 오늘 이렇게 옮겨졌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나에게는 괴로움을 덜어내는 일이다. 아침 독서로 <숨>이라는 책을 읽을 때마다 매일 마음이 고요해지는 듯했다. 여기서 더 무엇을 욕심을 바랄까?
오늘 당신에게 짧게라도 숨 돌릴 여유가,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숨>이라는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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