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너무 일찍 포기한 문과생을 위한 이과 센스
- 문화/독서와 기록
- 2018. 2. 15. 07:30
'절대'라는 표현을 이과생이 사용하지 않는 이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공통 1학년 과정을 마친 이후 2학년부터 문과와 이과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인다. 흔히 수능시험에서 수학을 포기한 사람들은 문과를 선택하고, 수학에 비대한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이과를 선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당연히 문과를 선택했다.
당시 이과와 문과의 구분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수학보다 나는 사회와 언어를 배우는 일이 훨씬 더 좋았기 때문에 문과를 선택했다. 문과와 이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학생들의 이유는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물론, 좋아하는 과목보다 성적을 보고 입시를 준비하는 이유도 있을 거다.
하지만 이때부터 나누어진 문과와 이과는 하나의 갈림길이 아니라 앞으로 선택할 헤아릴 수 없는 길로 나아가는 갈림길이었다. 문과를 통해 언어와 사회적 지식을 기반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이제 좀처럼 수학과 과학을 만날 일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수학은 고등학교 수능을 존재했을 뿐이다.
문과와 반대로 이과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미분과 적분을 상대해야 하고, 기괴한 수학 공식과 화학 기호들이 나열된 교재와 연구 과제와 씨름하며 문과가 만나지 않을 수학과 과학을 만난다. 고등학교 시절의 선택 하나에 의해 한 사람의 진로가 아주 커다란 스펙트럼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이과가 더 취업이 잘 된다고 말해 ‘문과? 그럼 공무원 해야 하겠네?’라는 우스운 농담이 더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었지만, 실제로 이과생도 취업은 어렵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과와 문과는 어디서 어떤 식으로 차이가 나게 되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더 필요로 하는 인재는 이과와 문과 둘 중 누굴까?
오늘 소개하고 싶은 책 <문과생을 위한 이과센스>의 저자는 첫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문과와 이과 외에 예술계나 체육계 등으로 학생을 조기에 세부적으로 구분하고 분류한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문학, 수학, 음악, 스포츠가 모두 한 덩어리로서, 모든 면에 풍부한 소양이 있어야 교양인이라는 일반 교양(liberal arts) 중시 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서양 사람의 의식을 따른다면, 어느 한 사람을 이과나 문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방살 자체가 일종의 환상이다.
이상으로 문과와 이과의 명확한 구분은 무의미하며, 이과를 특별 취급하면서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본문 16)
이 말은 굉장히 단순하지만 명백하게 오류를 바로잡고 있는 글이다. 교육과 문화적인 면에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과와 이과 외에 예술계와 체육계 등으로 학생을 조기에 분류하여 가르친다. 운동을 한다고 하면 학교의 본분인 학업을 거르더라도 이해해주는 분위기가 그렇다.
하지만 유럽을 포함한 미국 같은 서양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아무리 예술계와 체육계 등으로 진로가 정해지더라도 그 과정에서 문과와 이과 과목도 확실히 배우게 한다. 왜냐하면, 문과와 이과 과목을 통해 배우는 감정적 사고와 논리적 사고는 예술계와 체육계에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열풍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문학’ 또한 단순한 문과 과목이 아니라 이과적 특징이 들어간 ‘관찰과 시험을 통한 논리의 확대와 감정적인 깊은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문과와 이과의 특징을 융·복합적으로 이용하는 거다.
무척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아니, 재미있다고 말하기보다 이미 우리 사회의 트렌드가 문과와 이과의 특징을 융·복합적으로 이용하는 인재를 추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슬로건이 4차 산업 혁명 인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의 모토가 곧 융·복합적인 기술을 뜻하기 때문이다.
<문과생을 위한 이과센스>을 읽다 보면 문과와 이과의 특징이 어디서 드러나고, 과학자들은 최근에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눈이 간 부분은 1장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이과생은 대부분 ‘절대’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왜 이과생은 그런 걸까?
책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과생은 이론 구축과 실험을 통해 전례 타파를 위해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그런 과정에서 ‘전부’라든지 ‘확실’이라든지 ‘절대’와 같은 완전성을 확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대부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본문 40)
회의에서 발언을 주의 깊게 잘 들어보면, 이과생은 대부분 ‘절대’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문과생 중에는 ‘매출 5퍼센트 증가 절대 달성!’이라는 등 쉴 새 없이 ‘절대’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 적잖이 있다. 단순히 기질이거나 수사적 표현이라는 반론도 있겠지만, 언어에는 평소 사고의 흔적이 아주 정직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이과라면 대학 학부생 수준의 연구에서도 최초의 예측을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의미한지를 철저하게 주입받는다. 그러다 보니 코페르니쿠스 원리대로 실험의 전제 조건을 근본부터 바꾸거나 이론 전개를 뒤짚어엎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문과도 뛰어난 연구는 제대로 상대화하지만, 구체적 사례에 따라 사고할 때가 비교적 많기 때문인지 문과생은 몇 가지 전제에 구속되어 절대적 척도로 사안을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본문 47)
이 글을 읽다 보니 확실히 나 또한 글을 쓰면서 ‘절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던 것 같다. 이것은 내가 문과 출신이라는 것보다 평소 사고의 패턴이 ‘익숙한 법칙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생각한다.’라는 표현도 그럴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이과적 사고는 지금의 법칙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에 ‘절대’라는 원칙이 성립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뜨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게 가능한 거다. 바로, 이것이 이과 센스다.
<문과생을 위한 이과센스>을 읽으면 과학(이과)과 사회(문과)가 가진 각자의 패턴을 자세히 읽어볼 수 있다. 물론, 1장과 2장을 넘어가면 과학적 용어가 많이 등장해 나 같은 전형적인 문과는 약간 멀미가 올 수도 있다. 그때는 구글을 활용해 개념을 찾아보는 즐거움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이과’라는 말만 들어도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수학1과 수학2 같은 단어가 떠올라 진저리치는 사람들에게 <문과생을 위한 이과센스>을 추천하고 싶다. 앞으로 우리 시대가 바라는 것은 문과와 이과 둘중 하나가 아니라 문과와 이과가 섞인 센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센스가 차세대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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