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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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나는 희망을 품기보다 솔직히 절망을 품었던 적이 더 많았다. 끔찍한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시절에 누구 한 명 도와주지 않았고, 피해자인 나를 도와주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가해자를 도와주면서 발길질을 했던 그 경험은 철저하게 내가 사회를 불신하게 하였다.


 지금 어른이 말하는 중학교 2학년 시절에 겪은 그 일은 '중2병'으로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그때부터 나는 단 한 번도 우리 사회가 절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준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더욱이 사회적 약자는 서로 도와주기보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난 곳이 바로 우리 사회다.


 부자는 같은 부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똑같이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자를 상대로 부자들은 사기를 치고, 인간 대우를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노예처럼 부리고, 계약직을 핑계로 삼아 고장이 나면 새 부품처럼 갈아 치운다.


 그것을 우리는 '갑질'이라고 말하고, '현실'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못 산다.'고 말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한국 사회는 그렇다. 특히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데에는 '신물이 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악이다. 과연 이런 나라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있을까?


한국이 싫어서, ⓒ노지


 위에서 볼 수 있는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그런 냉정한 현실은 차갑게 받아들이고, 그래도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하는 책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알라딘 신간 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내가 맡은 분야인 에세이 분야가 아니라 다른 분야의 작품 목록을 살펴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제목부터 읽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나는 바로 구매를 했고, 먼저 읽던 <버려야 보인다>을 읽은 후에 책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에도 가슴이 막막한 이야기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한국이 싫어서>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은 단순히 '답답함'이 아니라 '비탄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한국이 싫어서>는 계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가 호주로에 이민을 가서 겪는 일을 1인칭 시점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첫 장을 넘겼을 때 읽을 수 있는 계나가 이민을 가려는 이유부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고, 호주에서 마주한 크게 달라지지 않는 현실은 한숨을 내쉬게 했다.


 하지만 호주에서 점점 적응하면서 좋은 친구를 만나고, 하나둘 배워나가면서 한국의 바뀌지 않은 현실을 말하는 장면은 '그래도 역시 한국보다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기에 이민을 가야 하나?'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다. 아마 호주에 이민을 하려고 했던 사람은 이 책이 정말 크게 와 닿지 않을까?


"예나야, 너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빌딩 꼭대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어느 게 더 위험한지 알아?"

"어느 게 더 위험한데?"

내 동생은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뜨악한 표정이었지.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몸이 땅에 부딪쳐 박살나 있는 거야.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p124)


 윗글은 개인적으로 <한국이 싫어서>를 읽는 도중 상당히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다.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몸이 땅에 부딪혀 박살 나 있는 거야.'이라는 말. 아직도 한평생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서민이 마주한 현실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이라고 말하면서 내 삶을 주장하는 나도 종종 로또 복권에 흑심을 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지만, 여기서 더 떨어지게 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 한쪽에서 벌벌 떨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 집은 상당히 어려운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나와 어머니는 '설마 더 어려워질까?' 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일상생활을 그대로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 만일의 사태에 준비하고 있는데, 윗글을 읽으면서 정말 울음이 터질 뻔 했다.


 도대체 왜 우리 한국 사회는 이렇게 사회적 약자가 정의롭게 사는 게 힘든 걸까. 사회적 약자끼리 아무리 사기를 치더라도 얻는 이익은 적을 텐데, 왜 하필 가족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걸까. 입에서 욕이 나오고, 닥칠지도 모르는 추락에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그래도 버티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남극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파블로를 잡아다 헬리콥터에 태워서 하와이에 내려다 줬다면…… 파블로는 그래도 행복했을까?"

내가 물었어.

"어쨌든 하와이에 갔잖아."

지명이 고집했지.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 누가 헬리곱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 자기를 헬리곱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 면에서 나는 파블로보다 형편이 나아. 파블로는 바다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어.(아무리 펭귄이 헤엄을 칠 줄 안다지만, 그래도 근본은 새잖아.) 하지만 내가 호주에서 산다고 해서 죽기야 하겠어? 기껏해야 괜찮은 남자를 못 만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사는 거지. 그런데 호주에서는 알바 인생도 나쁘지 않아. 방송기자랑 버스 기사 월급이 별로 차이가 안 나. (p160)


 두려워하면서 살지 않는 것. 그게 우리가 바라는 일이다. 윗글은 <한국이 싫어서> 소설의 주인공 계나가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이라고 말하면서 지명을 거부하는 대사와 묘사를 옮긴 글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우리가 가슴 한구석에 품은 응어리를 토해내게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혼자 끌어안고 있던 고민을 마주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좋았다. 책을 읽는 동안 애환, 비탄의 두 감정은 번번이 교차하면서 슬프면서도 햇빛을 기대할 수 있는 운율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낼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내가 외국인을 밀치고 허둥지둥 지하철 빈자리로 달려가면, 내가 왜 지하철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는지 그 이유를 이 나라가 궁금해할까? 아닐걸? 그냥 국격이 어쩌고 하는 얘기나 하겠지. 그런 주제에 이 나라는 우리한테 은근히 협박도 많이 했어. 폭탄을 가슴에 품고 북한군 탱크 아래로 들어간 학도병이나, 중동전쟁 나니까 이스라엘로 모인 유대인 이야기를 하면서, 여차하면 나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눈치를 줬지. 그런데 내가 호주 와서 이스라엘 여행자들 만나서 얘기 들어 보니까 얘들도 걸프전 터졌을 때 미국으로 도망간 사람이 그렇게 말았다더구먼. 학도병들은 어땠을 거 같아? 다들 울면서 죽었을 걸? 도망칠 수만 있으면 도망쳤을 거다. 뒤에서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러지 못한 거지.

나도 알아. 호주가 무슨 천사들이 모여 사는 나라는 아니야. (중략) 그래도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 게 있었지.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p170-171)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하면서 읽었던 부분은 윗글이다. 이 말을 하면 일베를 하는 사람은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그렇게 싫으면 이민을 가라.'고 말할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은 '노력은 하지도 않으면서, 불평만 하는 낙오자'라면서 비판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 모든 비판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싶다.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고, 바꾸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니까.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갖은 애를 써서 그 자리까지 올라가거나 떠나는 것, 현실에 안주하면서 내 삶을 살아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국이 싫어서> 책을 읽게 된 계기는 호기심이었지만, 이렇게 책을 다 읽고 나니 정말 좋은 책을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읽을 수 있었던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이 소설은 호주에서 공부했던 사람과 호주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의 인터뷰를 통해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그렇게 현실성을 띄었고, 우리가 누구나 가슴에 품었던 동경과 애환과 비탄을 자극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을 글로 표현하려고 하니 도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먹먹했고, 호주 이민을 생각하는 친구 한 명에게 권해주고 싶었다.


 작가의 말 뒤에는 문학평론가 허희 씨의 작품 해설이 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게 되면 내가 쓰려고 했던 서평에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일부러 읽지 않았다. 지금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쓰는 글을 마무리하게 되면, 한 번 읽어볼 생각이다. 독자도 꼭 이 과정을 거쳐보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헬조선'으로 불리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사는 모든 청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의 입에서 겨우 나온 말이 개새끼들의 이름을 묻는 일인 헬조선에서 아등바등 사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당신이나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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