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과 짜장면을 고민하는 나, 혹시 '선택 장애'일까?
- 시사/사회와 정치
- 2015. 5. 26. 07:30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선택하지 못하는 나는 이상한 걸까요?
우리는 삶을 살면서 언제나 많은 선택의 순간에 부딪히고, 항상 선택해야 하는 삶을 살아간다. 특정 선택지가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비록 우리가 고른 선택지가 실패로 가는 길에 놓여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경험으로 삼아서 성장할 수 있는 우연한 만남을 만나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들, 지금 내 인생의 무대에서 내가 주인공으로 내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말한다. '실패 없는 성공은 없습니다.'이라는 말을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주체적으로 내 인생을 산다는 것이고, 선택과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는 당연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현대인은 이런 선택을 미루는 경향이 상당히 짙어지고 있다. 짬뽕과 짜장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서 선택을 미루는 짬짜면이 나오게 되었고, 매운 돈까스와 평범한 돈까스 메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서 반반 돈까스 메뉴가 나오게 되었다. 바로, 선택을 미룬 선택을 한 것이다.
반반 돈까스, ⓒ노지
우리가 이렇게 '선택 장애'라고 말할 수 있는 현상을 겪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우유부단해서 그래. 뭘 하나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건 내가 이상한 거야. 내가 모자란 거야.' 하고 말하면서 '선택 장애'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자괴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 장애' 문제를 사회적 시선으로 보게 되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어떤 선택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경험이 줄어든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의 계획과 선택으로 영어 유치원, 스포츠 학원, 조기 영어 유학, 대학 등 모든 것을 결정하니까.
무엇 하나 내가 선택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끝까지 완수하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는 요즘 시대에서 우리가 '선택 장애'를 만나는 일은 어쩌면 필연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선택을 직접 하면서 실패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빼앗겨 버리니 매사 자신감도 없어지고, 선택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김제동의 톡투유
얼마 전 일요일에 우연히 편성표를 보다가 <김제동의 톡 투유>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일요일에 보았던 차례에서는 '선택'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단순한 '선택'이라는 주제 하나로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어떤 부분에서는 웃기도 하면서 유익하게 방송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개인적으로 수험생 시절에 사회 문화 인터넷 강의를 통해 알게 된 최진기 선생님께서 사회 과학의 시점으로 말하는 우리 사회 현상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다.
앞에서 이야기한 '선택 장애'도 최진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단어인데,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평소 내가 블로그에서 교육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야기할 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실패할 권리'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두 가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최진기 선생님, ⓒ김제동의 톡투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택지가 존재한다. '전셋값이 오르는데, 차라리 집을 사는 게 맞는 걸까?', '야식을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 여자와 결혼을 해도 될까?' 등의 고민은 우리가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이다.
그러나 점점 우리는 이렇게 두세 개의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피하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자기 의사 결정권이 부모님에 의해 행사되었기에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려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선택지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보는 시선도 줄어들고 있다.
최진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전셋값이 오른다는 건, 집값 상승 기대치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의미를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아마 단순히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뉴스로 흘깃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우리는 학교에서 항상 정해진 하나의 선택지를 달달 외워서 정확도를 겨루는 경쟁에서 살고, 가정에서는 '내 의사'가 아니라 '부모님의 의사'에 따라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선택 장애'를 겪지 않고, 자신 있게 '내 의사'를 말할 수 있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더욱이 우리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상명하복 문화가 지나치게 강요되어 온 사회다. '내 의사'가 아니라 '집단 의사'를 따르는 경향도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명하게 남과 다른 내 생각과 의지를 주장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이것을 선택해도 괜찮은지 걱정돼서, 선택지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의지에 영향을 받아 선택지의 폭도 좁아진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인생을 살면서 '선택'을 고민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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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장애를 겪는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내가 직접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경험을 늘려가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선택했으니까, 그 결과가 어떻든 내가 책임지고, 끝까지 완수하면서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 곧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내 삶'이 아닐까?
비록 우리 한국 사회는 한 번의 잘못된 선택과 실패를 받아주지 않기에 남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게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니, '모른다'가 아니라 솔직히 어렵다. 누가 실패의 책임을 지고 싶어 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겁이 많은 게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잘못인 거다.
그런데도 우리는 강의와 책을 통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심어주려고 한다. 이미 내 마음속의 답은 알고 있지만, 무서워서 답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미루기만 하는 거다. '때가 오겠지'가 아니라 '지금이 그때'임을 아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선택 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젊은이들에게 줄곧 반복하는 얘기는, 진짜 패배자는 싸우기를 포기한 사람이며, 어떤 상황에서건 인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놀라운 모험이다. 스무 번쯤은 다시 시작해도 된다. (무히카 어록 중)
독일에서는 무언가를 과감하게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실패자라는 말이 저주처럼 들러붙는다. 힌리히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한번 실패는 곧 영원한 실패다.' 안타깝게도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하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힌리히스의 리스트는 이런 완전무결함에 독단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행동이자 기업가 정신을 독려하는 자극제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기회와 위험 사이에서 지나치게 많은 저울질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창업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갈수록 저울추는 점점 더 위험 쪽으로 기웁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실수는 차가운 물속으로 그냥 뛰어드는 것입니다. 만약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은 옳은 길이었던 것이고,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p277_ 우리도 누구는 완벽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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