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인권 사각지대 보육원, 보호 받지 못하는 아이들
- 시사/사회와 정치
- 2015. 1. 28. 07:30
소외된 보육원에 필요한 건 CCTV 감시가 아니라 따뜻한 관심입니다.
인천 K 어린이집 폭행 사건 이후로 아동 학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뭐, 이 사건도 한 달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흐지부지되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아동 학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접근이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우리는 아동 학대에 대해서 자격 없는 교사,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어줄 수 없는 사람이 교사가 되었기에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교사가 아이를 폭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빙산의 일각에 해당할 뿐이다. 좀 더 큰 문제가 아동 학대 사건 뒤에 숨어있다.
아동 학대는 단순히 특정 지역, 특정한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가정에서도 이루어지는 아동 학대도 있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학대도 있다. 어른이 아이를 폭행하는 것을 '아동 학대'라고 한다면, 아이가 다른 아이를 폭행하는 것을 우리는 '학교 폭력'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많은 언론이 이번 어린이집 폭행 사건 이후로 어린이집의 허술한 관리 체계와 제도의 보완점만 위주로 말하고 있는데, 나는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사건을 보았으면 좋겠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글을 작성하였는데, 오늘 이 글은 지난 월요일(26일)에 본 '뉴스룸'이 계기가 되었다.
ⓒJTBC 뉴스룸
뉴스룸에서는 어린이집만이 아니라 보육원에서도 아동 학대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보육원은 보호자가 없는 고아 혹은 미아를 수용하여 일정한 나이까지 양육하는 시설이다. 이 시설에서 종종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양자로 보내지기도 하는데, 왠지 벌써 '아…….' 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보호자가 없다는 건 그만큼, 아이들이 쉽게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디까지 통계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심리학 연구 결과에서도 보호자 없이 자란 아이들이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법을 잘 몰라서 늘 겉돌게 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바른 가치관을 기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보호자가 없는 아이는 좀 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해당 시설의 어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시설 내의 상급생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이미 이와 관련한 보도는 자주 우리가 접할 수 있을 정도다.
보육원에서 정신 혹은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가 보육 시설의 어른 혹은 상급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뉴스, 혹은 집단 폭행을 당해서 도망치다 뛰어내린 뉴스. 그것을 우리는 과거에도 볼 수 있었다. 그냥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 보도하고 넘어갈 뿐이라 제대로 문제가 거론되지 못했다.
ⓒJTBC 뉴스룸
그러나 뉴스룸에서는 보육원의 폭행 사건을 보도하면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보육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앞으로 정부 당국에서도 정책으로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보도했다. 보육원은 사생활의 영역이 많아서 CCTV 설치도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여기도 설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단순히 CCTV를 설치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CCTV가 있는 어린이집에서도 아동 폭행 사건이 발생하고, CCTV가 있는 학교에서도 학교 폭력은 발생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서적 교육을 받지 못하는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일반 사람들은 보육원의 아이들에 대해 '부모 없는 아이가 무엇을 알겠느냐?' 같은 크고 작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계급제로 따지면, 상당히 하급 중에서도 하급에 해당하는 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폭력에 자주 노출이 되는 동시에 사랑을 똑바로 받지 못해 정서적 학대에도 시달릴 확률이 높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운영 지원금을 주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시설 운영 지원금을 지원해주더라도 시설을 운영하는 탐욕스러운 몇 어른의 손에 들어가기만 할 뿐,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이 어려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감사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나는 보육원에서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는 환경을 고치기 위해서 범정부적인 차원에서 이런 기관을 상대로 심리 상담 프로그램, 취미 활동 프로그램 등 정서적·육체적으로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지자체에 돈을 투자하고, 지자체가 보육원에 투자하는 것이다.
폭력에 노출되어 자괴감이 무너진 아이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마음이다. 다친 마음을 고치는 데 필요한 건 따뜻한 관심과 손길인데… 비록 일시적일 수도 있겠지만, 지속적인 상담 프로그램 운영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상당히 효과를 볼 수 있다.
|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보육원. 보육원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평범하게 생활하는 가정, 그리고 학교, 학원 등 여러 곳에서 아이들은 숨겨진 인권 사각지대에서 힘들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성인이 생활하는 사회에서도 그런 인권 사각지대가 정말 많다. 아이들의 세상이라고 다르지 않다.
CCTV를 설치해서 감시하는 것으로 사전 예방에 작은 도움은 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인권 사각지대를 막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있는 작은 상처가 폭력으로 변질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고, 경쟁 교육이 아니라 상생 교육이 필요하다.
한 달에 한 번씩 보육원, 어린이집, 학교 등의 시설에서 전문 상담사의 상담 프로그램과 멘토를 초청한 여러 활동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활성화할 수 있다면, CCTV를 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이런 방향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는 감정을 잃어버린, 감정 상실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일베 같은 사이트를 만든 것도 감정을 똑바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감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느끼고, 웃을 수 있다. 이 감정을 잃어버리게 되면, 사람은 웃을 수 없다. 폭력이라는 잔인함만 남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
자신을 비하하는 감정보다 우리의 삶에 더 치명적인 것도 없다. 스스로 비하하니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강한 자존감 없이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루한 삶'은 결코 살 만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비루함의 감정, 혹은 그런 정조를 강하게 띠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는 대부분 유년 시절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가 비루함을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슬픔'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칭찬보다는 비난과 험담을 일삼았다면,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부모를 만났다면 충분히 칭찬받고도 남을 일을 했는데도 자신의 부모는 매정하게 그것을 폄하하곤 했다면 말이다. "공부는 잘해서 뭐하니, 인간이 되어야지." "너는 엄마를 닮아서 구제불능이야. 피가 어디 가겠니." 이런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들었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 대해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잘해도 비난을 받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 (중략) 그렇지만 지속적인 애정과 칭찬이 있다면, 비루함도 조금씩 사라질 수 있다. 자신을 쉽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 오랜 시절 만들어진 습관화된 슬픔을 그만큼 시간을 들여서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봄 햇살이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을 녹이는 것처럼 그렇게 비루함이라는 고질적인 슬픔을 천천히 치유해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만이 비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법이니까. (p36_강신주의 감정수업)
이 글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