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 10대 청소년은 공감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 시사/사회와 정치
- 2015. 1. 15. 07:30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가정과 학교, 청소년은 갈등 속에서 헤맨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 10대 청소년의 범죄가 잔인해진 건 더는 놀랄 일이 아니다. 10대 청소년이 집단 성폭행을 했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고, 10대 청소년이 친구를 죽이거나 집단 폭행으로 어떤 사람을 사망케 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또?'이라는 평범한 반응을 할 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폭력에 무뎌지게 된 것은 개인이 언론을 통해 접하는 잔인함이 더 악랄해졌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하는 능력'이 사라지는 것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어떤 사건에 대해 그 사건의 중요성과 피해자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기에 어떤 뉴스에서 사람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오히려 피해자를 나무라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고는 이미 언론이 부추긴 갈등이 크게 점화되면서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화'만 남게 되었다.
얼마전에 <뉴스룸>을 통해 세월호 희생자의 누나가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누나는 전혀 들은 것도 없는 특례 이야기가 오가면서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악플에 상처를 받았고, 이렇게 갈등만 부추기는 언론에 크게 실망을 했다고 인터뷰에 응했다. 그리고 그 누나는 마지막에 '그래도 진실을 보도할 수 있는 언론인이 되고 싶다'고 꿈을 말했는데, 나는 정말 이 부분이 너무 가슴 아팠다.
ⓒ뉴스룸
세월호 희생자를 위해 애도는 하지 않을망정, 악플을 달면서 조롱하는 일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자신의 가차관과 맞지 않더라도 그 아픔은 공감하면서 서로를 다독여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우수상을 받은 배우 박영규처럼 "세월호 가족 여러분, 내년에 힘차게 우리 용기를 잃지 말고 삽시다!"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점점 이런 공감하는 능력이 우리 사회에서는 옅어지는 것 같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게 되면서 개인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예리한 칼처럼 변했다. 그 예리한 칼에 사람이 베여서 아파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2014년 말에 한국을 시끄럽게 하고, 2015년 초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는 갑질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이것이 심각한 이유는 이런 문제가 특정 계층에서 소수의 사람에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임대 세대를 차별하면서 어른이 먼저 아이에게 타인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방법을 보여주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보다 갈등을 부추겨서 상처를 주는 법을 가르쳐준다. 잔인함은 그 깊이를 더 해가고, 아이는 공감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린다.
ⓒ학교의 눈물
그리고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저런 식으로 차별을 가르치면서 갈등과 상처를 주는 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모자라 일부 어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포장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이다. 이를 우리는 '교육적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강요와 억압으로 아이의 자유를 빼앗아 어른의 꼭두각시로 삼는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말할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사랑을 좀처럼 바르게 배우지 못한다. 왜곡된 사랑 속에서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모자라 사랑하는 법을 모르게 된다. 더욱이 사랑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아이들은 인터넷에 퍼져 있는 사이트와 자신들이 생활에서 목격한 다양한 일화를 통해 사랑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게 되는데, 특히 성적 호기심이 생겨나는 순간에 심각히 어긋나게 되는 일도 발생한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 10대 집단(혹은 개인) 성폭행 사건을 접할 수 있는 사례가 드물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이미 공감하는 능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 타인의 아픔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언행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알지 못하는 청소년이 성적 욕구 혹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좀 더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는 순간,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대부분 학교에서는 사랑 교육을 소홀히 취급한다. 일반적인 교육 가치처럼, 다른 목표나 우선순위에 밀려 커리큘럼에서 제외된다. 성교육을 할 때도 사랑하는 관계의 충족감이나 아기를 갖는 기쁨보다는 성관계로 인한 감염의 위험이나 십대의 임신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한다. 가족생활의 기쁨을 탐색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드라마도 대부분 가족의 사랑보다는 갈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그러면 더 좋은 드라마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통찰하는 주된 분야인 문학조차 요즘은 다른 것을 가르친다. 내용보다 양식과 기술을 더 강조한다. 교실의 지배적 풍조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기보다 통제하고 훈련하는 것이며, 이 부정적인 분위기는 보살핌보다는 충돌을 부른다. 어쨌든 많은 교사들이 사랑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난처해한다. 요즘에는 학대나 부적절한 관계라는 오해를 살까 두려워서 아이들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문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사랑에 대한 태도를 성찰할 기회를 빼앗기고, 사회의 무분별한 영향을 이해할 수단도 없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성숙하고 사랑하는 어른으로 성장하겠는가?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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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청소년은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에 접근하게 되고, 그 어긋난 뒤틀림은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성추행 성폭행 사건을 비롯한 여러 폭력과 사회 범죄로 나타나게 된다. 좀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우리는 그 이유를 '사람의 학력을 높이는 교육은 성공했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에는 올바른 방향의 사랑이 들어간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책에는 "사랑은 공감, 다른 말로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는 능력의 발달에 토대를 둔다. 공감은 사랑의 밑바닥에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트라우마가 없는 아이는 이 능력이 있다. 교육적 폭력에 노출되지 않은 행운을 누린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아이에게 어떤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10대 청소년의 잔인한 범죄. 어쩌면 그 출발점은 바로 탐욕과 이기심을 먼저 가르치고, 교육적 폭력으로 잘못된 사랑을 정당화한 어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어른은 올바른 사랑을 가르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배움을 멈추고, 욕심대로 아이를 가르치면, 그것은 바로 교육적 폭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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