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저마다 사는 법이 다를 뿐, 틀린 인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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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서평] '그때 장자를 만났다', 만약 그때 장자를 만났다면… 나는 달라졌을까?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어제를 희생하고, 오늘을 희생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는 게 재미없다.' 혹은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인생을 살아야 하지? 이유를 모르겠다.' 등의 말을 하면서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우리가 그런 회의감을 만나게 되는 이유는 오늘을 즐기는 것이 행복임에도,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구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들었기에 우리는 오늘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내일을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식의 삶이 정말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성공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삶일까? 시간이 지나서 매일매일 '행복하다'며 웃을 수 있는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방식일까? 오늘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면, 내일은 더 크게 웃을 수 있을 수 있을까?


 글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개인의 가치관이라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쉬고 싶을 때 쉬지 않고 일만 하다가는 과로로 몸을 앓기 마련이고, 욕구를 절제하는 삶을 살다가는 평생 그 욕구를 채우지 못한 채 불구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게 인생이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 ⓒ노지


 위에서 볼 수 있는 책 《그때 장자를 만났다》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책이다. 우리는 언제나 공자가 말했던 것처럼 '인과 예'를 지키면서 언제나 형식 속에서 바른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오직 출세해서 내 뜻을 펼치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 되어왔던 거다.


 그 삶을 옳지 못한 삶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있기에 이를 부정하는 건 나를 부정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번은 '과연 나는 오늘의 즐거움을 내일로 미룰 필요가 있는 그런 대단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이라는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사는 삶은 정말 바른 삶이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비행(비행)을 일삼는 삶이 아니라, 공자가 말했던 그 군자의 도리를 지키면서 사는 삶은 마땅히 칭찬받아야 마땅한 삶의 자세다. 어릴 때부터 그것이 바람직하다 배웠고, 인생을 논하는 책은 다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오늘의 즐거움을 무조건 미루기만 하는 건 바른 삶이 아닐 수도 있다. 오늘 웃을 수 없는 사람이 내일 웃을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다. 오늘 웃지 않으면, 내일은 울 수도 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바로 우리가 사는 인생이다.


명검을 깊이 감춰두고 쓰지 않는 것은 지극히 보배로워 하는 까닭이다. (각의)


칼도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 됐으니, 조용히 감상하는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자의 시기는 전쟁이 일상이었다. 칼은 감상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싸움하라고 있는 것이다. '좋은 칼이니 아껴뒀다 나중에 쓰자'는 미련한 짓이다. 칼 가질 자격 없는 사람이다. '나중'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 써야 맛이다. 아끼다 똥 된다.

플라톤과 말싸움을 했던 시라수카의 참주 디오니시오스의 신하 중에 재산 모으는 게 취미인 사람이 있었다. 돈 단지를 땅에 묻어놓고 시간 날 때마다 돈 세어보는 게 즐거움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디오니시오스는 다른 신하를 시켜 그 돈을 몰래 가져오게 했다. 숨겨놨던 돈을 잃어버린 신하는 차곡차곡 돈을 모아봤자 남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돈이 생기는 족족 펑펑 쓰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 묻어뒀던 또 하나의 돈 단지도 꺼냈다. 그제야 디오니시오스는 훔쳐갔던 돈 단지를 주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빠지지 않는 잘난 척 한 마디. "이제 그대도 돈을 쓸 줄 알게 됐으니 이 돈을 돌려주노라."

돈을 쓴다는 건, 돈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다. 돈에 집착한다는 건, 돈에 매여 산다는 것이다. 사람이 돈의 주인이 돼야지, 돈이 사람의 주인이 되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 살아갈 때 돈이 돛이 돼야지 닻이 되면 안 된다.


뱁새가 깊은 숲에 들어도 몸을 두기는 한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생쥐가 강물을 마셔도 제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소요유)


_그때 장자를 만났다, p73-4


 윗글은 지금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미루고, 사용하지 않는 돈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이다. 돈이라는 건 분명히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이지만, 돈이 우리를 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돈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부리는 삶을 산다.


 이런 삶을 나무라는 사람에게 우리는 '돈이 없으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사회가 문제다.'이라는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건 우리가 돈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오직 '돈' 하나만을 가지고 행복과 성공을 운운하기에 돈이 우리를 부리게 되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지금 나도 돈이 없어 손에 넣지 못하는 나만의 집과 좀 더 큰 서재를 가질 수 있는 돈이 생긴다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해!!!"이라는 외마디 비명을 외치지 않을까 싶다. 로또 복권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욕심에서 나온 것이지 않을까?


 우리의 욕심은 이렇게 우리의 삶을 조금 불행하게 한다. 아니, 엄청나게 불행하게 한다고 말해도 들어맞을지도 모른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는 이런 우리에게 '어떻게 삶을 살라'이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시선을 바꾸면 삶을 즐길 수 있다. 삶을 갖는 게 아니라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프랭클린 플래너, ⓒ노지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벌써 2015년 프랭클린 플래너를 구매해서 내년에 이루고 싶은 꿈과 목표를 설정하고, 내가 게을러지지 않기 위한 비전 보드를 작성할 생각을 하고 있다. 아마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사람은 자신을 올곧게 나아갈 수 있는 어떤 목표가 없으면, 방황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런 목표와 꿈을 세우는 데에 있어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오늘을 희생해서 내일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 내일도 즐겁게 살 수 있다.'이라는 사실이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그게 바로 '사는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사는 것이다."이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종종 꿈과 목표는 타인의 시선에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설정하는데, 그 말은 이를 경계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선불교의 황금기를 닦았던 대주선사에게 한 제자가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습니까?"

"닦지."

"어떻게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거 남들도 다 하는데요?"

"아니지. 남들은 밥 먹을 때 잡생각하고, 잠잘 때 오만 고민에 빠지지."

밥 먹을 때는 밥 맛있게 먹는 게 잘 사는 거다. 잠잘 때는 잠 잘 자는 게 잘 사는 거다. 일할 때는 일만 열심히 하는 게 잘 사는 거다. 연애할 때는 열심히 사랑하는 게 잘 사는 거다. 하지만 데이트할 때는 일 걱정하고, 일할 때는 애인과 문자메시지 주고받기에 바쁜 게 보통 사람들의 삶 아니던가?

밥 먹을 때 살찔 걱정 미리 할 필요 없다. 확실하지도 않은 내일 일을 걱정하느라 당장의 잠을 못 이룰 필요도 없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금은 소금도 아니고, 황금도 아니고, 지금이라고 했던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일 필요 없다.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현재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법정의 말대로 "삶은 미래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다. 매 순간의 쌓임이 세월을 이루고 한 생애를 이룬다." (p118)



 그리고 책을 통해 "사람 숫자만큼의 인생이 있고, 그 숫자만큼의 정답이 있다. 천리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찾은 나의 정답을 따라 사는 인생이 천리마다."이라는 말도 읽어볼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을 남의 기준에 맞추기보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사는 것이 진짜 삶이라는 뜻이 아닐까?


 나는 오늘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책 《그때 장자를 만났다》를 통해 다가오는 새해를 맞아 남의 기준에 맞춰서 내 삶을 괴롭게 살기보다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바쁘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는 책이니까.


 또한, 책은 단순히 '장자'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공자의 논어', 그 이외에도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 이야기를 쉽게 읽을 수 있어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현재 공자가 말하는 삶을 사는 사람, 서양의 철학자가 말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오늘날, 자유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속박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답답한 세상에서 규범에 나를 가두기보다 좀 더 자유로운 장자를 만나 삶의 피로감을 털어내고 마음이 움직이는 일을 하며 나로서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소한 마음만이라도.


에픽테토스 자유란,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우리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자유로이 쓸 수 잇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글자를 알아야 하고, 문법을 알아야 한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제멋대로 쓰면 아무도 읽지 못한다. 완벽한 자유란, 실제로는 전혀 자유롭지 않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장자의 생각은 다르다. 규칙은 더 나은 규칙으로 대체될 수 잇다. 규칙 안에만 머물면 더 나은 규칙을 생각해낼 수 없다. 장자가 세상 밖에 머무르려는 진짜 이유다. 어차피 문법은 바뀐다. 매여 있는 게 아니다. 새로운 단어도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언어도 발전한다. 이태준이 <문장강화>에서 쓴 것처럼 "말은 영구히 '헌 것, 부족한 것'으로 존재한다. 글쓰는 사람은 전래어든 신어든 외래어든, 오늘 아침부터라도 이미 존재하는 어떤 언어에도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끊임없는 새 언어의 탐구자라야 한다."

틀을 개려는 노력이 없으면, 규칙 자체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노력이 없으면, 창조는 없다. 답습이 있을 뿐이다.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천 자루를 몽당 붓으로 만들어"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체를 만들어낸 서예가 김정희는 장자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다. "난초를 그리는 데 법이 있어도 안 되고 법이 없어도 안 된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개 줄을 걸고 산다. 개 줄을 끊어내야 한다. 그 개줄은 단지 외부로부터의 간섭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부여하는 속박 역시 개 줄이다.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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