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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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중독의 시대, 알랭 드 보통이 건네는 신랄한 뉴스 사용 설명서


 우리는 아침 뉴스로 하루를 시작하고, 밤 9시 뉴스로 하루를 끝내는 일상을 반복한다. 단지, 아침과 밤에 TV로 정규 뉴스만 시청하는 게 아니라 업무를 하는 도중에도 스마트폰과 태블릿PC 같은 다양한 기기를 이용해 언제나 뉴스를 접한다.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난 뉴스를 보지 않는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뉴스는 그저 대다수가 관심을 두지 않는 정치, 사회, 경제 같은 이야기를 담은 뉴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좀 더 넓은 분야 속에 속해있는 모든 이야기를 보도하는 그런 뉴스를 말하는 거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연예인이 모델로부터 협박을 받았다는 거나 어떤 애완견이 어떤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거나 어떤 연예인이 모 프로그램에 출연해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거나 우리 시의 시장이 어떤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거나… 모든 것이 뉴스이다.


 우리는 이런 뉴스를 단순히 TV로 시청하는 뉴스만이 아니라 인터넷,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접한다. 사람이 깨어있는 동안 뉴스를 접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연인과 만날 때에도 뉴스를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왜 이렇게 우리는 뉴스에 집착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마트폰을 꺼내어 이런저런 뉴스를 읽어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이 이유에 대해 얼마 전에 읽었던 《뉴스의 시대》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어째서 우리 대중은 계속 뉴스를 확인하는 걸까? 이는 공포와 큰 관련이 있다. 뉴스에서 눈을 떼고 나서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습관처럼 불안이 축적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이 쉽게 잘못되는지, 또 순식간에 벌어지는지 안다. 연료관이 파열된 A380 항공기가 불길에 휩싸인 채 굴러서 만에 처박힐 수도 있다. 아프리카 박쥐에서 유래된 바이러스가 종의 장벽을 뛰어넘어 승객들이 가득한 일본의 통근전철에 달린 환기구로 스며들 수도 있다. 투자자들이 매각을 통해 통화가치 급락을 부추길 수도 있으며, 겉보기에 평범한 아버지가 어여쁜 두 자녀의 삶을 폭력적으로 끝장낼 수도 있다.

바로 근처에는 안정과 평화가 있을 것이다. 정원에서는 산들바람이 자두나무의 가지를 흔들고, 거실의 책장에는 조금씩 먼지가 쌓여가고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평온이 존재의 혼란스럽고 난폭한 핵심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잠시 뒤에는 나름의 근심이 습관처럼 자라난다.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염두에 자리잡은 생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안테나 철탑 쪽으로 휴대전화를 돌려놓고 기사 제목이 뜨기를 기다릴 때 희미하게 잡히는 두려움의 맥박을 해명해준다. 그 맥박은 우리의 먼 조상이 동이 크기 직전의 싸늘한 순간, 태양이 변함없이 창공에 떠오를지 궁금해하면서 느꼈을 게 분명한 불안이 모습을 바꿔 나타난 것이다. (p14)


ⓒ뉴스의 시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까?' 하며 인터넷 서점에서 돌아다니다 우연히 위에서 볼 수 있는 책 《뉴스의 시대》를 보게 되었는데, 왠지 모르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책을 구매했다. 그리고 이 책이 내게 준 건 책을 구매하는 데에 사용한 15,000원의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좀 더 할인이 되었지만.)


 이 책은 길지 않은 짧은 호흡만으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 '장시간 시간을 들여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다. 또한, '뉴스'라는 무거운 소재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책 자체는 작은 숨결에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정말 뼈 있는 내용이 있다.


 우리가 접하는 뉴스는 언제나 일방통행식의 사실을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는 그 뉴스를 향해 어떤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기레기'라는 속된 말로 볼품없는 같은 기사를 쓴 기자를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뉴스를 좀 더 색다르게 읽는 방법을 《뉴스의 시대》는 이야기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꼈던 '와, 정말 뉴스는 이런 식으로 볼 필요가 있겠구나.', '그래. 난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뉴스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등의 말이 나오는 감정과 생각을 비슷하게 느끼거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이지만, 이건 우리가 아는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뵈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뉴스의 가짓수는 엄청나되 사건의 배경이 되는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하지 않고, 뉴스 속 의제를 지속적으로 바꾸며, 살인자들과 영화배우들의 화려한 행각에 대한 기사를 끊임없이 갱신하여 사방에 뿌림으로써, 바로 조금 전 긴급해 보였던 사안들이 현실과 계속 관계를 맺은 채 진행중이라는 인식을 대중이 갖지 않도록 조처하기만 하면 된다. 이 정도면 대다수 사람들이 가진 정치적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을 약화하는 데 충분할 뿐더러,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사람들이 정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끌어냈을 결의를 훼손하는 데도 충분하다. 현상태는 뉴스를 통제하기보다 오히려 흘러넘치게 할 떄 오래도록 충실하게 유지될 수 있다. (p36)


(노지: 실제로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 사고가 터지고, 군 가혹 행위 사고가 터지면서 나라 전반의 부실이 도마 위에 올랐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터지는 연예인과 관련한 사건이나 다른 사건에 눈을 돌리면서 정치적 현실을 잊은 채 오늘 하루 치맥으로 하루를 덧없이 보내고 있다.)


뉴스는 악당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일단 악당 중 최악의 인간들은 경찰에 넘긴다. 하지만 악당 대다수는 저널리즘 고유의 수단을 통해 다뤄지는데, 그 수단은 바로 모멸감을 주는 것이다. 뉴스는 풍자적인 기사, 현관 앞 인터뷰, 비밀스러운 사진과 서신 유출 등을 통해 이에 대해 상당한 열정을 선보인다. 함량 미달의 인간은 뉴스거리로 바뀌어야 하고, 그런 다음 그들은 도덕적인 다수의 혐오에 직면할 것이다. 여기에 은연중 내포된 것은 그들이 명성의 추락과 대중의 맹비난에 직면하면 사회가 개혁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수치심이 정말로 인류 개혁에 가장 쓸모 있는 도구로 이용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는 모멸을 당하면 더 나은 인간이 될까? 두려움은 가르침을 줄까?

악당들의 비행에 관해 쏟아지는 수많은 기사들은 부정행위와 농간을 다루는 모든 보도가 응당 떠받쳐야 하는 하나의 목표, 즉 국가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욕을 현저하게 결여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기사들은 공적인 삶의 발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쓰러진 먹잇감 주변을 맴돈다. 회계, 결혼, 대학, 이민 혹은 세금 제도를 더 낫게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우리에게 색다른 재미를 안겨주려 할 뿐이다. (p76)


 위에서 읽을 수 있는 글은 《뉴스의 시대》 초반부에서 읽을 수 있는 '정치뉴스'라는 소단원에서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이처럼 뉴스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지겹도록 읽으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는 그 뉴스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단지 '뉴스에 왜 이런 일이 보도되는가?', '왜 이런 식으로 뉴스는 사실을 적어 놓았는가?' 등의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주체적으로 우리가 뉴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고, 요즘 우리 시대에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길게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나라의 언론은 권력의 치와와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다. 많은 기성세대가 선호하는 조·중·동이라는 신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친일파와 함께하며 짖으라면 짖고, 꼬리를 흔들라면 꼬리를 흔든다.


 그런 언론에 대항해 많은 사람으로부터 '이 사람의 뉴스는 믿을 수 있다'는 신뢰를 얻고 있는 게 바로 《손석희의 JTBC 뉴스》이다. 손석희의 뉴스가 우리에게 더 진실처럼 다가오는 건 이 책 《뉴스의 시대》 저자가 말한 뉴스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주류 언론은 확립된 경제 재도 안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활동을 주로 취재한다. 또한 현재 벌어지는 일은 말해주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혹은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뉴스가 의제를 만들어내는 한, 노동시장 개선을 위해 개입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화폐동맹을 탈퇴해야 하는지 가입해야 하는지, 인플레이션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하는지 조금 풀어줘도 좋은지 같은 제한적인 문제 제기만 가능할 뿐이다. 뉴스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경제 '논쟁'은, 대중의 기대와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중의 감각 모두를 엄격한 통제선 안에 가두고 그 밖으로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 그런 의제에서 벗어나려 하면 (예를 들면 주주란 무엇이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자고 하거나 성장과 복지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품는다거나 하면) 갑작스레 '급진적'이라 간주되고 따라서 우습게 여겨지고 만다. 우리가 오늘알 당연히 여기는 것들 대부분(최저임금, 아동 보호, 환경 정책)이 처음에는 미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돼 '합리적인' 의견으로 정착된 것인데도 말이다.

완벽한 뉴스 서비스라면 현재의 사안을 분석하면서도,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내는 과감한 경제 원리도 전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통찰에 따라 마음속에 간직한 경제적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 유토피아란 풍요로우면서도 품위 있고, 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큼이나 돈의 본래 목적인 충만함, 공정함, 관대함, 아름다움, 그리고 친절함에 대해서도 신경쓰는 공동체다. 완벽한 뉴스 서비스는 사회다 다다라야 할 목적지에 대해서만은 교조적인 태도를 취하겠지만, 뻔한 수단을 자명한 것인 양 지지하면서 점점 취약해지고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좌파와 우파의 분석과는 달리, 거기에 이르는 방법 면에서는 실증적인 유연함을 유지할 것이다. (p160)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지금 우리나라가 잘못된 방향이 수정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고,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내가 저 사람처럼 악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를 원하고,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내가 현실을 모르지 않는 깨어있는 지식인임을 정의하려고 한다.


 뉴스는 단순히 우리에게 있어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가십 거리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만드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정치, 사회, 경제의 뉴스만이 아니라 연예, 일상 등 모든 뉴스가 그런 역할을 하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정보가 넘쳐흐른 이 시대에서 우리는 뉴스를 똑바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냥 이것저것 다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그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 더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뉴스의 시대》가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 《뉴스의 시대》는 그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이 시대를 사면서 만나게 될, 아니 지금도 만나고 있을 뉴스를 좀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아주 멋진 사용 설명서가 되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2014년의 대한민국을 사는 시민이라면, 아니, 뉴스 중독의 시대에 사는 이 시대의 한 사람이라면, 꼭 이 책 《뉴스의 시대》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무겁지 않은,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난 앞으로 몇 번은 더 반복해서 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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