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라는 말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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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서 '정의'라는 이름을 외친다는 것에 대한 무게는….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적에 재미있게 보았던 애니메이션 중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서 기억이 남아 있는 애니메이션은 《세일러문》, 《웨딩피치》, 《카드 캡터 사쿠라》 등의 작품이다.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재미있게 보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남자아이들은 이런 작품보다 《드래곤볼》 같은 작품을 좋아하기 마련인데, 유독 나는 저런 작품을 좋아했다. 그리고 여 캐릭터 이미지를 가지고 당시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는데, 아마 지금까지도 내게 남아있는 여자 같은 성격은 그 당시에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투니버스 채널을 비롯한 TV를 통해 본 애니메이션은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추억이었으니까.


 그 작품 중 《세일러문》은 이번 2014년에 《세일러문 크리스탈》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되어 방송되고 있는데, 과거의 인기만큼이나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많은 팬이 다시 한 번 더 그 애니메이션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여주인공 츠키노 우사기가 악을 마주해 외치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라는 대사는 많은 팬이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대사다.


 나는 이 대사를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병실에서 영화 채널을 통해 본 《7번방의 선물》을 통해 세일러문과 그 대사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츠키노 우사기의 대사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는 대사를 통해 작은 스침이 머릿속에 지나갔는데, 그 생각을 좀 더 가다듬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우리 사회에서 '정의'라는 이름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다.


ⓒ세일러문 크리스탈, (구글 이미지 검색)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정의'라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 반영되는 '정의의 사도가 악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우리 사회를 사는 사람의 바람이 담겨있는 것이다. 매번 혼란한 시기에 악을 퇴치하는 영웅이 등장하는 작품은 늘 우리의 위안이 되었고, 세대를 넘어 크고 작은 희망을 심어주는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다.


 특히 다시 한 번 더 전 세계적으로 큰 위험을 마주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정의의 사도'라는 그 단어는 많은 사람의 크고 작은 염원을 담고 있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뉴스를 틀면 바로 들을 수 있는 가자지구를 두고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러시아 반군과 미국의 미세한 갈등… 등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국외로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이 국내로 시선을 돌려도 세월호 사고부터 시작해 4대강 황폐화, 의료민영화의 조짐… 등 여러 문제로 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이건 단순히 어떤 특정 사람들의 싸움이 아니라 나라를 이루고 있는 시민이 힘들어지는 그런 갈등이기에 우리는 좀 더 그 고통을 체감하며 '절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비판 의식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러나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이 세상에서 '정의'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건 우리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정의'라는 단어는 언제나 돈과 권력을 가진, 가진 자에 한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힘없는 자가 외치는 정의는 절대 정의가 될 수 없다. 그저 그건 한여름의 바깥에서 들리는 매미 소리처럼 소음에 불과하다.


가자지구 폭격 중단, ⓒ구글 검색


 국제연합 UN이 평화 유지군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멈추게 할 수 없는 건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능력하다고 말하기보다 그저 UN의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상임이사국이라 명분이 있어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그저 두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다.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고 있는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잔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과거 식민지를 두고 쟁탈한 그 시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그 시대처럼 민간인의 피해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민간기 격추도 결국 국가 간의 대립에 힘없는 민간인만 희생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다.


 국내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고도 그렇다. 이 세월호 사고는 무능한 정부가 내린 낙하산 인사와 그 낙하산 인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썩은 톱니바퀴 시스템 속에서 첩첩이 쌓여오고 있던 일이 터진 인재다. 그런데 그 사실을 부정하며 가진 자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 책임 소재를 유병언 회장을 비롯한 일가에 떠넘기고 있고, 진실에서 국민의 눈을 돌리려고 애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건 그들이 '우리가 하는 게 정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언론을 선동질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바로 앞에서 사람이 죽었어도 쉽게 개입할 수 없도록 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고, 작은 목소리를 내지만… 그 목소리는 절대 정의라는 단어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거다. 《세일러문》의 주인공 츠키노 우사기가 말하는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은 그만큼 무거운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가는 금세 이상한 범죄자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당장 한국 내에서 박근혜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여당의 뻔뻔함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종북 좌파'라는 몰매를 맞으니까.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적 갈등을 가지고 있는 많은 국가가 비슷하다. 가장 우리와 닮은 국가는 바로 일본이다. 지금 일본은 아베 내각의 막무가내 행동에 야당 측과 시민 단체를 기반으로 한 많은 일본 시민이 그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아베 내각과 여당의 힘을 좀처럼 막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의 영향력을 정말 많이 받으면서 눈치를 보는 일이 자주 있는데, 일본 소설가의 소설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도 자주 읽어볼 수 있다. 내가 과거에 읽었던 이사카 코타로의 《사막》, 《마왕》 등의 소설이 그랬다. 일본 사회 내에서도 지나치게 미국에 붙어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려고 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이 정말 많다.


 우리 한국도 일본과 비슷하다. 지금 당장 여당 내만 하더라도 친박 비박으로 나누어져 있고, 야당 내에서도 특정 세력으로 나누어져서 갈등을 빚으며 좀처럼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시간만 보내다 선거기간에 '다 바꾸겠습니다'는 거짓말을 하고, 선거가 끝나면 시민을 향해 삿대질하며 모른 체만 한다. 참 기가 막히지 않는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도 좀처럼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다. 시민들이 거리 행진을 하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더라도 정치인과 관련된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들이 가진 돈과 권력이라는 힘은 그것이 가능하게 해준다. 아무리 힘없는 시민이 몇만 명 모이더라도 그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다.


 "강한 자는 이기고, 약한 자는 멸망한다." 이게 바로 우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법칙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는 영웅을, 악을 처벌하는 각시탈 같은 민중의 영웅을, 가진 자의 부패를 고발해 그들을 벌하는 영웅에 담고 있는 바람은 그 법칙을 깨뜨리고 싶은 욕망이다. 가진 자에 의해 휘둘러지는 세상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시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약자가 '정의'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그래서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는 말은 그렇게 무게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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