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생이었던 선생님이 들려준 학교의 슬픔
- 문화/독서와 기록
- 2014. 7. 21. 07:30
《학교의 슬픔》, 조금이라도 교육에 관여한다면 꼭 읽어야 할 책
우리에게 있어 학교라는 건 무엇일까? 학교라는 글자가 우리 머릿속에서 그리게 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학교라는 글자가 우리에게 무조건반사로 바로 들게 하는 생각은 무엇일까? 학교가 우리 인생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학교는 즐거운 배움의 장이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학교는 끔찍하기만 한 건물이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곳이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오늘 하루 웃을 수 있는 곳이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학교가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가는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어떤 학생이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열등생이었다면 학교는 당연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더 쉽게 그려질 것이고, 모범생이었다면 학교는 당연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쉽게 그려질 거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학교'가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에는 '교육'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 특히 교육열이 특히 심한 나라 중 하나인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학교'와 '교육'이라는 두 단어에 아주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 우리 주변만을 둘러보더라도 10대 청소년의 폭력 사건이 뉴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교육은 도대체 어떻게 되려나?'라는 걱정을 하게 하고, 이상한 인물이 나와 교육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며 '대통령과 나라가 미쳤군.'이라는 말을 하게 하니까.
나는 이렇게 '학교'와 '교육'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고 있는, 아니, 그 이전에 '학교'와 '교육'이라는 두 단어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에게 한 권의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그 책은 바로 아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학교의 슬픔》이라는 책이다.
학교의 슬픔, ⓒ노지
이 책은 '변해버린 이 강물처럼 변화하는 사회 속의 학교가 아니라, 그 끊임없는 전복의 한복판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영속적인 것에 대해 말이다. 열등생과 부모와 선생들이 공유한 고통, 학교가 빚어낸 그 슬픔의 상호작용에 대해'(p21)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한때 열등생이었던 저자가 학교의 선생과 부모의 질타를 받으며 열등생이라는 늪에 점점 깊게 빠지고 있던 그가 어떻게 그 늪에서 건져질 수 있었는지, 선생이 되어서 만난 열등생과 그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학교의 슬픔》이라는 책을 통해 읽어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시중에서 읽어보았던 대중적인 교육 서적과 다르다. 일반적인 책은 대체로 가르침을 받는 아이가 늘 정상적으로 수업을 따라오며 어떻게 더 높은 성과를 올릴 것인가에 대해 집중하고 있지만, 이 책은 열등생을 중심으로 학교와 선생님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패거리 짓기를 오로지 주변적인 현상으로만 치부하는 모든 이에게 말하겠다. 당신들 말이 맞다. 실업이 그렇고, 소외된 자들의 결집이 그렇고, 인종적 결속이 그렇고, 낙인의 횡포와 편부모 가정이 그렇다, 맞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 하나만큼은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모두가 이해하는데 혼자만 이해하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학생의 고독과 수치만은.
우리만이 그를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그 일을 위해 양성되었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나를 구해냈던- 그리고 나를 교사로 만들었던- 선생님들은 그 일을 위해 양성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무능한 학교생활의 기원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았다. 원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거니와 나에게 설교를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위기에 빠진 청소년을 마주한 어른이었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던졌다. 그들은 나를 놓쳤다. 하지만 매일같이 다시 몸을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거기서 건져냈다. 나와 더불어 다른 많은 아이도 건져냈다. 말 그대로 우리를 낚아올린 것이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 (p47)
뭐, 어떤 사람은 이 책을 이해하는 게 조금 난해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한 번도 열등생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거나 열등생과 눈을 마주치려고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어쩔 수 없다. 우리 학교와 교육이라는 시스템이 이상적으로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이니까. 늘 정형적인 틀 속에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주입받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경쟁을 강요받고, 그런 사람이 최고라는 말에 꿈과 목표를 거기에 두고 있으니까.
이건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더욱이 이상한 교육부 장관을 후보로 내세운 현 정부의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보면, 앞으로도 아이들의 소중한 학교와 교육을 가지고 엉터리 짓을 하려는 것 같아 화가 날 지경이다.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 모양인 걸까?
비록 이런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책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이 책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건 분명히 지금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이라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책은 단순히 형식적인 이야기를 권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열등생이 마주한, 열등생이었던 선생이 마주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공부 못하는 학생들'(앞날이 없다고 여겨진 학생들)은 학교에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 개의 양파다. 수치스러운 과거와 위협적인 현재와 선고받은 미래라는 바탕 위에 축적된 슬픔, 두려움, 걱정, 원한, 분노, 채워지지 않는 부러움, 광포한 포기, 이 모든 게 켜를 이루고 있는 양파. 저기 다가오는 학생들을 보라. 성장해가는 그들의 몸과 책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수업은 그 짐이 땅바닥에 내려지고 양파 껍질이 벗겨져야만 진정으로 시작될 수 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단 하나의 시선, 호의적인 말 한마디, 믿음직한 어른의 말 한마디, 분명하고 안정적인 그 한마디면 충분히 그들의 슬픔을 녹여내고 마음을 가볍게 하여, 그들을 직설법 현재에 빈틈없이 정착시킬 수 있다.
물론 그런 호의는 일시적이며, 양파는 밖으로 나서는 순간 다시 겹을 두를 것이고, 당연히 내일 또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선생이라는 직업이 필연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다시 시작하는 일. 만일 우리가 한 명의 학생을 우리 수업의 직설법 현재에 정착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의 앎과 그것의 활용에 대한 안목이 이 아이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그들의 실존은 식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막연한 결핍의 늪지에서 질척거릴 것이다. 물론 우리 선생들만이 그런 갱도를 파낸 것도 아니고, 그걸 메울 줄 몰랐던 것도 우리 책임만은 아니지만, 그때 그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 혹은 몇 년의 어린 시절을 우리 앞에 마주앉아 함께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망쳐버린 학교생활 일 년은 하찮은 게 아니다. 어항 속에서는 영겁의 세월이다.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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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가 있겠지만, 이 책 《학교의 슬픔》이 정말 좋은 책이라는 사실은 크게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을 거다. 이 책은 학교와 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는 내 모든 마음을 걸고서 '좋은 책'이라고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대로 이 책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학교'와 '교육'이라는 두 단어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면 꼭 한 번쯤은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당장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선생님을 꿈꾸는 학생이나 아이에게 가치관을 심어주는 부모나 어느 분야에 속하더라도 말이다.
이건 절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모범생을 가장 옳은 정답으로 두고, 학교 폭력을 일으키는 문제아들은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로 취급하기만 했다. (뭐, 학교 폭력을 일으키며 기세등등하게 다니는 문제아에 대한 관점은 나도 비슷하지만)
그러나 이 책은 그 열등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 열등생이 어떻게 늪에서 건져지는지 혹은 건져지지 못한 열등생이 어떤 식으로 되어버리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교육에 관여하는 선생님이 어떻게 열등생을 대해야 하는지, 우리가 직면한 학교와 교육의 슬픔은 무엇인지도 분명히 읽어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꼭 추천해주고 싶다. 나 한 명 개인이 정말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서 이 책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받아들여지리라고 기대하는 건 욕심일 거다. 하지만 책이 가진 이야기는 분명히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가 고개 돌리고 있던 사실을 똑바로 보게 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이야기 중 일부를 남긴다.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숙제를 검토할 때 나는 딴 데 가 있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죠."
그녀에게 다른 곳이란 그녀가 첼로 연주자로 활약하는 현악사중단이었고, 그곳에서는 음악이 요구하는 절대성을 그녀의 첼로 연주에 강요했다. 게다가 그녀는 교실과 오케스트라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이해했다.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까다로운 일은 우리의 음악가들을 잘 꿰뚫어 보고 조화를 찾아내는 거죠.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예요. 만일 그들이 땡땡거리기만 하는 작은 트라이앵글이나 브롱브롱 소리만 나는 갱바르드를 물려받았다면, 적절한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내는 그 모든 소리, 그들이 훌륭한 트라이앵글과 나무랄 데 없는 갱바르드가 되는 일, 그래서 각자의 기여가 전체에 부여한 음악의 질에 자랑스러워하는 일이죠. 조화에 대한 감각은 그들 모두를 발전시키고, 조그만 트라이앵글은 마침내 음악을 알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제1바이올린만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똑같은 음악을 체험하는 거지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리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베를린 필을 꿈꾸죠. 이해가 가는 일이에요......"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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