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100도씨, 미얀마 제빵왕 박구영 "진심으로 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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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제빵왕 박구영의 강연100℃, "진심으로 대하라"


 우리는 삶을 살다 보면 "물질적 가치가 먼저다!"고 말하는 사람과 "사람이 먼저다!"고 말하는 사람을 두루두루 만나게 된다. 그런 말을 항 당시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이들을 만나면 크게 달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항상 물질적 가치를 먼저 추구했던 사람들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거나 오히려 폭삭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인본주의를 추구했던 사람은 정말 높은 자리에 앉아 제대로 성공이라는 것을 손에 쥐고 있다. 내 말이 의심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정말 제대로 성공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 중에서 사람을 먼저 챙기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범죄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학교 폭력도 어쩌면 지나치게 물질적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예전에는 논어와 같은 고전을 통해 아이에게 먼저 사람이 되고, 그다음에 자기 뜻을 펼칠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되든 말든, 일단 공부부터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고 가르친다. 이러니 아이의 인성이 갈수록 나빠지고, 인격장애가 생기고, 아이가 점점 더 겉돌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직 '사람이 먼저다'는 생각에 조금 의아심이 들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사람을 먼저 대하여 큰 도약의 기회를 맞아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현재 미얀마에서 제빵왕으로 불리는 박구영 씨이다. 박구영 씨는 자신이 미얀마에서 최고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자.



미얀마 제빵왕 박구영, ⓒBKS1 강연100℃


 지금 박구영 씨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다고 하여 처음부터 최고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박구영 씨가 스물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위암 말기 판정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이른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가족을 책임지는 데에 시골 농사로는 상당히 힘이 들어 그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산에 일하러 갔었는데, 그곳이 바로 빵집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3년 동안 열심히 기술을 배워 대구에서 작은 빵집을 개업하였으나 6개월이 가지 못한 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그동안 배운 기술이 너무 아쉬워 좌절할 틈도 없이 다시 재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제빵기술을 더 다듬기 위해 다시 기술을 배웠고, 철저한 시장조사를 통해 꼼꼼히 매장 오픈을 준비해나갔다. 그런 준비를 마친 후에 다시 빵집을 오픈하였는데, 정말 박구영 씨 본인도 놀랄 정도로 장사가 잘되어 부산에만 빵집을 세 개나 운영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빵집은 운영하며 한국으로 제빵기술을 배우려 온 미얀마 두 청년을 만나 자신의 빵집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 어려웠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고, 박구영 씨는 그들을 가족처럼 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미얀마 사업가와 함께 식사하자는 말을 듣고, 그는 고향이 그리울 두 청년을 데리고 함께 그곳에 갔었다. 바로 이날이 박구영 씨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열망을 품게 하는 작은 싹이 땅을 헤치고 나오는 시점이었다.



 당시에 함께 식사를 했던 미얀마 사업가가 박구영 씨에게 미얀마에서 베이커리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해왔고, 박구영 씨는 그 제안을 듣고 지금 자신이 머물러 있는 자리와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박구영 씨는 한국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랐었지만, 최고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기술을 가지고 미얀마에 가서 5년 안에 최고가 될 자신이 있었다. 박구영 씨는 새로운 도전을 향한 설렘과 평생 배운 이 기술을 가지고 타국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그는 반대하는 아내를 끝끝내 설득하여 미얀마로 자신의 인생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미얀마에 도착하여 빵집을 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박구영 씨는 난관에 부딪혔다. 미얀마에서 한국과 같은 방식으로 빵을 만들 수 없었다. 가게를 다 정리하고, 반대하던 아내를 힘들게 설득하여 이곳에 왔는데― 쉽지 않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는 현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빵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너무 자존심이 상했고, 제대로 빵을 만들 수 없으면 빵집을 열 수 없기에 계획했던 것보다 1년을 미루면서 철저한 연구에 들어갔다. 미얀마의 거친 밀가루로 만들 수 없는 부드러운 빵을 만들 수 있는 비결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는데, 한국에서 함께 미얀마로 간 두 청년 중 한 명이 그 비결을 찾았다. 그는 드디어 그 재료를 가지고 와 미얀마 사람들이 원하는 빵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가게가 오픈 시점에 접어들었을 때, 그의 빵집 앞에는 몇 대의 카메라와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나라 미얀마에서 한국인 제빵사가 빵집을 연다는 소문이 나서 나라가 떠들썩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수 천 명의 기대 속에 빵집을 열게 되었고, 가게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미얀마의 유명 연예인과 TV 광고를 찍었고, 그 이후에 한 달도 안 되어 많은 손님이 몰려왔었다. 1년 만에 정말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고, 미얀마에서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으며, 가게를 서서히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미얀마 제빵왕 박구영, ⓒBKS1 강연100℃


 박구영 씨가 만약 한국에 있는 많은 악덕 업주들처럼 외국인 근로자들을 상대로 인의를 지키지 않았다면, 박구영 씨는 지금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그가 가족처럼 지냈던 미얀마 두 청년의 만남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하였다. 즉,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인생에 큰 가치가 있는 일인지를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박구영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며 미얀마와 함께 한 사람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한국에서 만난 두 명의 미얀마 친구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방인에 불과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국에 있을 때나 미얀마에 있을 때 한결같이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그들은 나의 가족이었으나 내가 미얀마에 있을 때는 내가 그들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진심으로 저는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현재 미얀마에 직원이 350명인데, 미얀마 사람들은 정말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장병을 앓는 미얀마 친구 아내의 치료를 도왔고, 한국의 지인과 함께 미얀마 아이들의 심장병 치료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을 보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사업도 키워가야 겠지만, 미얀마의 사람들을 위하여 내 일생을 미얀마에 바치기를 원합니다.


 누군가는 박구영 씨의 뛰어난 시장조사 능력과 베이커리 기술이 성공의 원천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도 그의 성공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그가 사람을 먼저 생각했기에 사람을 위한 빵이 만들어졌고, 그 빵에 담긴 진심이 미얀마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것은 말하는 것은 인본주의인 사람이 먼저고,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그 사람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는지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많은 사람이 사람보다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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