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행복해지면 불편해하는 어른들

반응형

한국은 10대 청소년이 행복을 쫓으면, '가만히 있으라' 하며 어른이 불편해 하는 나라


 2014년이 시작하고 나서 우리가 사는 나라 한국은 조용한 날이 없어졌다. 2014년의 봄부터 세월호 사고로 안전 관리 부실과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고, 군부대 내의 잔인한 가혹행위 살인 사건과 함께 군부대의 은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정부 기관에 대한 시민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지다 못해 땅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문제만이 아니라 의료 민영화를 비롯한 우리 시민이 사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두고 많은 갈등이 빚어지고 있고, 어른의 문제만이 아니라 10대 청소년도 얽히는 학교 문제도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들고 있다. '학교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하고 2년이 지난 지금 학교는 거꾸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대 청소년의 작은 행복을 위해 9시 등교를 시작하자 많은 부모가 "수능을 앞두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라고 말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한, 자사고 폐지를 통해 공교육을 살리고자 하는 교육감에 대해서도 부모가 반대하고 있고, 교육부는 돈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면서 좀 더 인간적인 학교로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초를 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 이렇게 어른들은 자꾸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길을 거부하고, 아이들을 끝없이 무한 경쟁이라는 불행한 길로만 내몰려고 하는 것인지를…. 얼마 전에 소개한 《학교의 눈물》이라는 책을 이야기할 때 '학교는 아이들의 관점이 아니라 어른들의 관점에서 감시하도록 만들어진 건물'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시사 이야기/학교와 교육] - 학교의 눈물을 닦기 위해 어른이 알아야 할 것

[시사 이야기/학교와 교육] - 왜 우리는 학벌주의 사회를 벗어나지 못할까?


 즉,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거부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아이들이 내 손에서 벗어나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같은 불편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아이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느냐며 따지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다른 설명을 할 수가 없다.


ⓒEBS


 위에서 볼 수 있는 그래프는 구글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OECD 주요국 청소년 행복 지수 순위 그래프다. 우리 한국 청소년 행복 지수를 살펴보면, 2010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런 상황임에도 많은 어른은 "어쩔 수가 있나? 그 시절에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포기해야 하는 시기이다."라고 말하며 에둘러 변명한다.


 나는 감히 그런 사람들에게 주장하고 싶다. "현재가 행복해야 미래도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 물론, 현재를 방탕하게 사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청소년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이 방탕한 교육을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저 지나치게 경쟁으로 쉴 수 없는 청소년에게 쉬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나한테는 지금이 바로 황금기입니다. 지금 이때뿐이라고요. 과거나 앞으로의 일은 관심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 아니, 사람들은 뭐하는 겁니까.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다든가, 공무원이 되겠다든가, 사법고시에 붙겠다든가 하는데, 그게 다 뭐를 위한 겁니까? 말로는 그러면서 요즘 보면 개나 소나 빈둥빈둥 할 일 없어 보이는데요, 뭘."

 (이사카 코타로, 사막 中)


 그런데 많은 어른이 그런 것을 거부한다.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아이가 얼마나 비뚤어진 인성으로 다른 사람을 갉아먹는 악마인 지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우리 아이는 공부만 하면 됩니다. 좋은 대학만 가면 누구나 다 우러러봅니다."라고 말하며 아이의 미래를 자신이 직접 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청소년 행복 지수는 좀처럼 올라가지 못하는 거다. 청소년이 자신의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언제나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같다. 학원에 다니며 성적을 올려야 한다고 해서 사교육을 받고, 자지 말고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만 하고… 하나하나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많은 청소년이 계속 반복되는 그런 생활에서 활기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게 되면서 그저 공부만 하는 인형으로 전락해버린다.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말과 '엄마 친구 아이보다 순위가 더 높아야 한다'는 말에 하기도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할 수밖에 없다. 조금만 쉬고 싶다고 말해도 욕을 먹는다.


 그게 우리 한국 청소년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청소년은 자라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는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공부를 더 잘하지 못해서 이렇게 불행한 거야.' 하고 자책하며 자신의 아이에게도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열등감 속에서 행복해지지 못한 채, 새벽에 홀로 소주 한 잔을 마시며 세상을 한탄하는 삶을 산다.



 어쩌면 그런 삶을 사는 어른이기에 '지금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을 사는 아이들에게 "내가 살 때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 힘들어도 참았다고! 왜 너는 못해! 왜 너는 행복해지려고 하는 건데! 나도 불행했다고, 그냥 그렇게 살아!"라고 화풀이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끔찍하지만, 인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폭력이 얼마나 많은가. 연인 간에 볼 수 있는 데이트 폭력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가정 폭력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잃고 싶지 않기에 경쟁 시대에서 집착이 오직 살아남는 길이기에 그런 식으로 어긋난 가치관이 형성되어 많은 폭력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학교 폭력은 더는 공부 못하는 날라리 학생의 부산물이 아니다. 요즘 학교 폭력은 전교 2등을 하고, 학교 반장을 하고, 학교 전교 회장을 하는 상위권 아이들이 더 난리를 친다. 그들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잘못된 교육 철학 속에서 자랐고, 내가 행복해지는 길은 남의 불행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대 청소년의 범죄가 갈수록 지능적으로 변하고, 잔인해지는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다. 잘못을 제때에 지적해주지 못하고, 조용히 묻어버리는 어른이 있고, '학교 폭력은 없지?'라며 거짓말을 강요하는 어른이 있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아이를 이용하려는 어른이 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의 청소년은 불행하고, 아이들이 행복해지면 어른들은 불편해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마치 바싹 메말라 있고, 불평·불만과 냉소, 방관과 탄식으로 얼룩져 있는 사막 같다. 우린 그곳에서 매일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한고비 한고비를 넘기고, 그러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환경에 익숙해져 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진실은 어느 때에나 바뀌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이자 나라다.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이라고 여기는 삶은

삶의 여러 모습 중에서 단지 한 가지일 뿐이다.

우리는 왜 다양한 삶의 방식을 모두 저버리고

단 한 가지 방식만 따라야 하는가?

땀을 쉽게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태여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밥벌이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어디서 살았으며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中)



반응형
그리드형(광고전용)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