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눈물을 닦기 위해 어른이 알아야 할 것
- 시사/학교와 교육
- 2014. 8. 30. 07:30
여전히 슬픈 눈물을 흘리는 학교, 학교의 눈물을 닦기 위해 어른이 알아야 할 것
어제 나는 《학교의 눈물》이라는 도서를 읽고, 다시 한 번 더 우리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우리 청소년의 문제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군 가혹행위를 비롯한 다양한 비인간적인 사건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이건 절대 우리가 '나는 그렇지 않아', '내 아이는 그렇지 않아'라며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눈물》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는 학교 폭력 해결책에 대한 관심이 커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그 폭력 해결책에 대한, 사전에 아이가 자신이 입은 상처를 마주하고 치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에 관해 관심이 급격하게 사라졌다. 그러면서 아이는 지금도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안기면서 소위 말하는 '불량 청소년'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이는 그런 식으로 10대 시절을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남학생은 대게 누구나 한 번쯤은 다 간다는 군대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군 가혹행위자'가 되기도 하고, '관심병사'가 되어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위험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이는 학교에서, 가정에서 시작한 잘못된 굴레가 원인이 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의 눈물을 닦기 위해, 그 안에서 무너지는 아이를 지지하기 위해, 그 안에서 어긋난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게 될 아이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 문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단지 교육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문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문제는 모두 함께 맞물린 톱니바퀴로, 하나라도 금이 가게 되면… 모두 어긋나기 마련이니까.
학교의 눈물, ⓒ노지
위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는 내가 《학교의 눈물》 책을 읽으면서 도중에 드는 생각을 책에 바로 적은 부분이다.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필기를 하다 보니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필기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는 좀 좋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근 내가 적는 메모는 대체로 다 이런 식으로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여 있다. 이 부분은 딱히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학교의 눈물》 책을 읽으면서 여러 페이지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적었다. 그 글은 모두 내 개인의 경험이 바탕이 된 글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는 글도 있고… 나 자신을 질책하거나 내게 있었을 지도 모를 어떤 보이지 않는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도 있다. 그런 식으로 적은 글이 꽤 된다.
오늘 이 글에서는 어제처럼 《학교의 눈물》이라는 책이 어떤 이야기를 가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책을 읽는 동안 했던 내 생각과 그 생각을 바탕으로 책에 일본어와 한국어로 메모한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어쩌면, 내가 한국어보다 일본어로 쓰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우리말로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슬이는 무엇보다 "너도 잘못이 있으니까" 피해를 당했겠지 라거나 "네가 약해서" 학교폭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 가장 억울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는 학교폭력 가해자뿐 아니라 학교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뿌리 깊은 편견이 존재해왔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비행청소년일 것이라는 편견처럼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대체로 소심하고 우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소년법정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들 중 상당수가 우등생이거나 중산층 가정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폭력 피해 역시, 특정 부류의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소심함과 우울함은 오히려 학교폭력 피해의 후유증인 경우가 많다.
… 피해 학생이 자살을 하면, 학교폭력이 아니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예슬이는 이런 심리학자의 이론을 사실로 확인시켜준 사례였다. (p90)
과거에 나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에 나를 끔찍하게 괴롭혔던 한 아이 때문에 정말 괴로워했었는데, 그 당시 담임 선생님은 오히려 나를 질책하며 '네가 모자라서 그런 것을 왜 공부 잘하는 애 발목을 잡으려고 하느냐?'라는 폭언을 했었다. 게다가 나만이 아니라 이 일로 학교에 온 어머니께도 '애가 모자래서 적응을 못 한다. 그러니 애들의 놀림감이 된다. 이런 애 때문에 그런 앞날이 밝은 애에게 먹구름이 껴서 되겠어요?'라고 말하며 치를 떨리게 했다.
왜 자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왜 피해자에게 네가 문제가 있으니 맞았겠지…."라는 말을 하며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아물지 않는 상처를 주는 걸까? 그건 그냥 그들의 허울 좋은 변명이 아닐까?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해자를 정신 이상자로 몰고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까. 그래서 학교 폭력은, 사회 폭력은 해결되지 않는 거다. "가해자를 왜 피해자가 조사하느냐?"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기에 잘못은 수정되지 않는 거다.
"뭐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잠 잘때요."
마치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처럼 아이들도 마음의 에너지가 떨어지면 밤낮으로 잠을 잔다. 우리가 만난 아이들 중에는 유난히 잠을 많이 자는 아이가 많았다. 왜 그렇게 잠이 많냐고 물으면 아무도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지만, 학교에서도 틈만 나면 잠을 자고, 집에서도 자다가 눈을 떠보면 벌써 학교가 끝날 시간이라 등교를 못했다는 식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잠을 필요이상 많이 자는 것은 불면증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의 주요 증상 중 하나라고 한다. (p99)
책을 읽어나가면서 한숨이 길게 쉬어졌고, 가슴에 돌이라도 들어간 듯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환경을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였을까. 난 도무지 알 수 없다.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아이들의 눈에서 괴로운 눈물을 흘리게 하고, 왜 그 결과를 외면하면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걸까. 꿈을 포기하게 하면서까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이익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부모라는 건 자식을 그렇게 도구로 취급해도 되는 건가?
이렇게 작은 아이에게, 이렇게 여린 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계속 떠넘기면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하는 이 사회가, 난 정말 싫다. 그리고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바꾸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자꾸 외면한 채 '네가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어른은 더 나쁘고 싫다.
"선생님! 지나갈 거라는 게 일이 시작된 후 점점 심해지기만 했어요. 괜찮아, 애들이 널 때리지는 않잖아. 때리더라고요. 욕하고 때리고 침뱉고 발로 차고. 사람들은 다 지나간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요. 그럼 자살한 학생들은 왜 자살했겠어요? 그것도 다 지나갈 텐데 왜 죽었을까요? 나아기지는 뭐가 나아져요. 괜찮아지기는 뭐가 괜찮아져요? 제 인생은 어릴 때부터 계속 나빠지기만 했어요. 엄마랑 관계는 더 안 좋아지고 친구들 관계도 점점 나빠지는데 어른들은 버티라고만 해요. 좋아지겠지. 좀 참고 견뎌봐라. 밝은 미래 따위가 올거라면 그게 대체 언제 온다는 거죠? 내가 죽기 전에요? 백발 할머니 돼서?" (p117)
왜 어른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곧 지나간다고 버티라고만 말하는 걸까? 중량 1톤인 아이의 등에 중량 100톤을 짊어지게 해놓고,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말하는 걸까?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그 짐을 왜 자꾸 우리가 어깨와 등에 둘러메고 버티라고만 말하는가?
우리는 넘어지고, 울어야 한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 수 있어야 한다. 10대를 산다는 건 그런 것이고, 아직 어린 아이니까. 그런데 왜 우는 것을 어른은 못하게 하는 걸까?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걸까? 군대나 세월호나 학교나….
ⓒ학교의 눈물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10년 이상 시간을 보내는 학교라는 공간을 어떤 교육 철학이나, 아이를 위한 복지 개념에서 바라보는 일에 아직 서툴러 보인다. 우리나라 학교들은 그 공간 자체가 갖는 매력이 부족하다. 차갑고, 획일적이며 폐쇄적인 느낌이 들 때가 많고, 오래된 학교일수록 계획성 없는 증축으로 미로의 공간을 만들어 아이들로부터 쾌적함과 안전함마저 빼앗아버리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전국 어딘가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 '완벽한 폐교'를 찾아낸다면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 두 건축가가 구상한 학교는 기존의 학교와는 다른 공간이었다. 공공건축이라서 한계는 있곘지만 학교가 좀 더 개성 있는 건축물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학교가 감옥이나 병영처럼 감시와 효율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학교라는 공간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 마음의 교류와 소통이 이뤄지기 힘든 공간 구조라는 건축가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p143)
그렇다. 이런 건물이 바로 우리가 다녔던 학교고, 우리 아이가 다닐 학교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해!"라는 명령어가 언제나 강압적으로 붙는 하향식 시스템만을 고집하고 있는 곳이 학교다. 도대체 어떻게 더 높고, 더 넓은 장소에 이런 방식의 교육이 도달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획일적인 시스템을 고집해서는 절대 다른 생각을 하는 아이가 그 능력을 키울 수가 없다.
이것을 우리나라에 사는 어른은 알아야 한다. 정치가는 알아야 한다. 교육자는 알아야 한다. 부모는 알아야 한다. 하지만 황우여 같은 교육부 장관과 늘 소통하지 않는 지도자가 언론을 통제하며 일방통행을 고집하는 이 나라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일 것이다.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에 털끝만큼도 가지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이익 분기점만 바라보는 그 사람들에게는….
"무서워 미치는 줄 알았어요. 처음에 앉아 있는 의자에 껌 붙여있던 거 생각나고 막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질문도 많이 하고 활발해보이던데?"
"네, 좀 나대봣어요. 일부러 무서운 걸 티 안내려고요."
"약해보이기 싫어서?"
"약해보이기 싫었다기보다 그냥 무서워하는 걸 눈치채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를 당하다 중학교 때 결국 자퇴를 했다는 민경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좀 다른 아이도 있었다.
"무엇보다 제가 지금 밝아보이는 건 제 상처에 대해 건드리는 사람이 없잖아요. 누군가 그걸 건드리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죠."
이건 다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내 이야기였다. 난 조금이라도 괴롭힘을 덜 당하기 위해서 웃으며 지내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지 않아도 강한 척을 하기 위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10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20대가 되어서도 변한 것이 없다. 웃는 얼굴의 가면은 사회생활의 필수품이 되어 언제나 사람과 마주할 때마다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쓴다. 정말 안심하고 웃을 때도 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있을 때에는 늘 그 가면을 쓴다.
언제나 가짜가 되어 생활하고, 언제나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짜 행세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10대 시절에 겪은 그 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꼈다. 고통 속에서 울부짖어도 누구 하나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고, 누구 하나 등을 토닥여 주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강한 척하기 위해서 우는 얼굴 위에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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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일컬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많은 부모가 조건부 사랑을 하고 있다. 기분이 내킬 땐 아이를 끔찍하게 사랑하지만, 아이가 문제행동을 하면 더 이상 애정을 쏟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많은 아이들은 부모가 아닌 다른 상대를 마난서도 나를 끝까지 믿어줄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시험을 한다. 이것은 부모가 과거의 잘못된 양육방식을 반성하고 태도를 바꿨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아이는 부모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가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더 심한 문제행동을 한다. 아이의 이런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하면 어렵게 마음 먹은 부모의 노력도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것이다. (p178)
지금도 조건부 사랑은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부모와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어른은 자녀를 향해 성적, 태도 그 모든 것을 기반으로 조건부 사랑을 한다. 특히 이런 문제는 큰 상처가 되어 아이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부모 앞에서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하고, 부모의 제 욕심이 아이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아이를 향해 손찌검을 하는 가정폭력으로도 이어진다. 이 모든 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날의 기분에 따라 태도가 바뀌는 부모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정말 버틸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서로 싸우기만 하면, 그 기분에 따라 나와 동생을 대했다. '빌어먹을. 그냥 혼자 살고 싶다.'라는 바람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가출 청소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가출은 선택하지 않고, 방의 문을 닫고 방에서 컴퓨터로 가상 세계에 들어가거나 책으로 다른 세상에서 삶을 살았다.
"저희 아빠는 술을 너무 많이 드시고 그럴 때마다 폭력을 휘둘러서 너무 무서워요. 그걸 어디 가서 말할 수가 없으니까 학교에 가면 자꾸 우울해지고, 그럴 때마다 맘에 안드는 애들한테 시비를 걸어서 때려줬어요."
"제가 학교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모든 일엔 이유가 있어. 너 같은 애가 찐따야. 대체 왜 그러고 다니냐고. 가족도 그러는데 남들은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집 밖에 나가는 거 자체가 두려워요." (p218)
…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제작에 참여한 적이 잇다고 하면 누구나 빼놓지 않고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 "정말 아이 문제가 다 부모탓인가요?" 나 역시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그런 죄책감에서 벗어나 보려고 아이 문제가 부모 탓이 아니라는 증거를 수없이 찾아 헤맸다. 부모의 양육법보다 타고난 기질이나 뇌의 문제가 큰 경우도 있지만, 그 또한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따지고 보면 아이 문제는 부모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부모의 양육법은 다분히 사회적인 압력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p220)
부모는 어른인 자신의 가벼운 행동이 얼마나 심각하게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의 마음이 안으로부터 무너질 때, 아이가 낭떠러지로 몰렸을 때 아이의 손을 잡아 주며 다시 품을 수 있다. 아이의 상처는 대게 모두 부모로부터 받는다. 부모가 자신도 모르게 입힌 작은 상처가 아이의 어긋남을 만들고, 그 어긋남은 아이가 자존감을 잃어버리게 하면서 스스로 어긋난 길을 가게 한다. 부모는, 어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생님이 꼭 아빠 같아요. 우리 아빠랑은 이런 얘기 해본 적 없는데…."
아이들은 부모에게 바로 이런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을 시시콜콜 들어주고 내 입장에서 같이 생각해주며 지적보다 칭찬으로 변화에 흥을 돋우는 부모 말이다. 또 다른 아이는 매 상담마다 아껴뒀던 비상식량을 꺼내놓듯 하나씩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고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제 선생님한테 제 애기 전부 다 한 것 같아요. 속이 후련해요."
아이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꼭 야외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는 태도만으로도 부모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 아이들 마음에 작은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그 유기적인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는 일선 학교에서 교과선생님과 담임선생님, 상담선생님 사이에 이런 과정이 실현될 수 있다면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질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언제까지 교사의 희생정신과 신학기 대진운을 바라며 불안하게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할까. 꿈의 학교가 실현되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도 우리 부모들의 몫이지만, 그 꿈이 실현될 때까지 부모는 현명한 상담선생님 역할도 충실히 해내야 한다. (p234)
… 그렇다. 단지 "잘했구나.", "힘냈구나!"라는 가벼운 말 한마디를 따뜻한 어조로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부모는 아이의 마음에 안정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잘 하지 않으면서 늘 다른 사람과 비교만 하면서 상처를 주는 걸까. 70점을 받던 성적이 88점을 받았으면, 적어도 '잘했어."라는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거기에다가 "겨우 88점? 왜 그렇게 못 쳤어? 다른 아이는 100점 받았다더라."라는 말을 하다니, 그런 비극은 막장 드라마나 다름없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학교에 상담실과 상담 선생님이 있고, 아이가 상담 선생님과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변화를 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과거 내가 중학교에 다녔던 시절에도 상담실과 상담 선생님이 있었다. 상담실이 내가 속했던 반의 청소구역이라 곧잘 청소했었는데, 그러면서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어차피 곧 죽을 건데요. 뭘…. 뭘 열심히 해요?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죠.' 등의 말을 하고는 했었다.
당시에 상담 선생님은 순간적으로 얼굴색을 바꾸시며 "상담을 좀 해야겠다."라고 말을 하셨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상담에 응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 시절에는 학교라는 곳이 싫었고,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어떻게든 버티고자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는 상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책이나 컴퓨터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곳에서는 괴롭히는 사람도, 아픔도 없으니까.
만약 그때 내가 상담을 받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통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작은 하나의 계기만으로도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쉽게 내가 가슴에 품은 것을 바꿀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난 그 시절 가슴에 품은 '악(惡)'이라는 정의를 그대로 품고 있으니까. 그래도 한 번쯤 상상하게 된다. 그때 내가 바뀌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지….
교사도 부모처럼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다. 교사들은 대부분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체벌이 금지되자 아이들이 교사를 더 우습게 보게 되서 학교폭력도 늘어났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 자체가 폭력인 체벌로는 학교폭력에 절대 대응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교사들이 폭력적인 수단으로 권위를 지켜왔기 때문에 아이들 사이의 폭력도 그만큼 정당화돼왔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체벌 대신 됴사의 권위를 바로 세울 대안을 찾지 못해 무방비 상태가 된 과도기이며, 그 대안을 찾는 것이 학교폭력 예방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교육과학기술부 정책보좌간이기도 한 차명호 교수는 교사들이 그동안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권위를 다시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공급자인 교사 중심에서 수요자인 학생 중심으로 교사의 직무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일제고사 결과가 다른 학교보다 낮으면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체벌했습니다. 똑같은 문제인데 너희가 옆 학교 아이들보다 공부를 덜해서 성적을 낮게 받았으니 맞아야 한다는 논리였죠. 하지만 이제는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일제고사가 결과가 다른 학교보다 낮으면 선생님들이 모여서 토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옆 학교 선생님들보다 뭘 잘못 가르쳤길래 우리 애들 성적이 더 낮은건지 고민하셔야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수요자 중심 교육입니다." (p268)
그래서 지금도 폭력에 대한 인식은 한국에서 좀처럼 바뀌지 못하고 있는 거다. 맞지 않으니까 공부를 안 한다, 맞지 않으니까 말을 안 듣는다. 그런 구시대적인 생각으로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을 통제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발생하고, 문제의 원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사람이 죽어가는 일을 내버려두는 거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군 가혹행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까지 어리석은 '폭력 중심'의 주장을 외칠 것인가? 그런 폭력이 중심에 서는 독재가 옳다고 말할 심산일까?
"웃긴 게 겉으론 학교폭력 하면서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요. 선생님들도 학교폭력에 대한 설문지를 들고와서는 "그런 일 없지?"라며 처음부터 막아버리고. 학교는 은폐시키려고만 해요."
"학교 입자에선 뭔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나 봐요. 제 앞에서 가해자 애들 편을 들어주면서 저한테는 네가 잘못했으니까 애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 뭔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버려요."
"애들만 그런 게 아니라 선생님들도 저한테 관심 없어요.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안 펴도, 엎드려 잠을 자도 저만 내버려두더라고요. 담임선생님이든 상담실이든 다 귀찮아요. 내가 왕따당하는 걸 얘기해도 어차피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p276)
학교는 언제나 숨기는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늘 모든 부정적인 일은 다 숨기고 본다. 이건 학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 지금 문제의 중심에 있는 군대 등 모든 곳이 그렇다. 이건 자신의 결점을 보이지 않으려는 방편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은 언급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며 잘못을 외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른은 언제나 자신은 올바르고, 정당하기에 자신과 반대되는 아이들의 괴로움을 무시한다. 그 일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학교의 눈물
학교의 눈물을 닦기 위해서 어른은 알아야 한다. 지금 고개를 돌린 순간,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아이들이 흘린 눈물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이어진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총을 들고 사람을 향해 쏠 수밖에 없었던 사람, 목을 메고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보았는가? 그 모든 원인은 어른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 학교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기에 발생한 끔찍한 사건이다.
글이 정말 길어지고 말았지만, 이 마지막 문장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스크롤 바를 내려준 독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이 글에서 적은 모든 글은 내가 《학교의 눈물》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적은 내 생각이다. 내가 적었던 생각의 조각은 내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이다. 직접 당했던, 시뻘건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손톱에 살이 파일 정도로 주먹을 쥐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책과 신문과 세상이 내게 보여준 그런 모든 게 바탕이 되었던….
다시 말하지만, 학교의 눈물을 닦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바꿔!"라고 호통치는 것이 아니라 어른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건 학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모든 분야가 그렇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자살률이 높고, 살기 힘든 이유는 거기에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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