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한센인과 함께 한 의사 오동찬의 이야기
- 문화/문화와 방송
- 2013. 4. 5. 07:00
[강연100℃] 소록도에서 한센인과 함께 하는 의사 오동찬,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우리가 삶을 살다 보면 정말 쉽지 않은 일임에도 남들보다 먼저 나서서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고, 남들이 모두 기피하는 일을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한 사람이다'는 생각도 하지만, '쉽게 살 수 있는 인생을 왜 저렇게 살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이 대단한 것은 그렇게 누구나 좋지 않은 편견으로 볼 수 있는 일에 그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남을 위한 마음만으로 그런 일들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에게 인정받지 않더라도 묵묵히 그 일을 한다. 그래서 더 대단한 사람이다.
갑자기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된 이유는 이번에 할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통 의대를 나온 의사들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 병원에서 편하게 일을 하기를 바란다. 실제로 의대를 가는 목적 중 하나가 '쉽게 벌면서 로열패밀리 층에서 인생을 편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하니 그 말이 썩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 할 이야기의 주인공도 의사인데, 그는 남들이 다 기피하는 장소에 공중보건의로 갔으며, 그곳에서 그는 지금까지 19년 동안 머무르며 환자들을 보살피고 있다. 의사라면 마땅히 더 큰 욕심을 부려도 되는 처지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오늘 할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센인이라는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사는 소록도에서 19년째 의사를 해오고 있는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오동찬 씨이다. 그의 이야기는 평범히 의대를 다녀서 의사가 된 사람과 사뭇 다르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린다. 이제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소록도에서 19년 의사 오동찬, ⓒKBS1 강연100℃
소록도는 원래 과거에 그 누구도 꺼렸던 섬이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이곳에 가기로 했던 이유는 아주 작은 계기였다. 그가 고등학교에서 영어 수업 시간에 우연히 슈바이처에 관하여 배우게 되었고, 그는 '나는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치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학에서 학생으로 지내다가 그는 2학년 때 우연히 소록도와 한센인과 관련한 한과 편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이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의대생이라면 인턴을 마친 후 공중보건의를 거쳐야만 했다. 그는 공중보건의로 가기 위한 자신이 원하는 병원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소록도를 보고 그는 국립 소록도병원을 신청했다.
그가 소록도 병원을 신청했을 때 주변에서는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그의 후배들은 "형 미쳤어? 왜 그런데를 가? 거긴 나환자들이 있는 무서운 곳이야!"라고 말했고,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너 미쳤느냐? 왜 그런 곳을 가? 이 어미 눈에 흙이 들어가면 가라"고 말하며 심한 반대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때 자신과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이기에 오히려 즐거웠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께 "딱 1년만 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소록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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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소록도에 도착하여 처음 만난 환자는 한센병의 후유증으로 아랫입술이 처진 환자였다. 처진 입술 때문에 연신 침을 흘리기 일쑤였고, 안 그래도 한센병 후유증 때문에 제대로 식사도 못 하는 사람이 더 힘든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많은 연구를 하여 처진 아랫입술 재건을 위해 6시간의 시간을 걸쳐 수술을 하였고, 결과는 성공적으로 그 환자분은 더는 처지지 않는 입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런 환자 400여 명을 수술해드렸다.
그런 식으로 그는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한센인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이것에 관하여 물어보았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선생도 1년 있다가 갈 건데…"라고 답을 하셨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소록도에 온 의사들이 늘 1년만 있다가 떠났기에 정을 주었다간 입는 상처가 너무 커 정을 잘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진료가 끝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의 빨래와 청소를 도와주었다. 한 날은 그렇게 도와주다가 식사를 권유받아 밥을 먹었던 적이 있는데, 다음날 이 소식이 섬에 소문이 났다. 다음날 다른 할아버지께서 그에게 식사를 권했고, 또 다음날은 다른 할아버지께서 그에게 식사를 권했다. 그는 불러주는 대로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제야 소록도 주민들이 그를 '오선생'이라며 친근하게 불러주었다.
이렇게 그는 19년째 소록도에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한센병이 두렵지 않느냐고 그에게 물어보기도 하지만, 그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저는 19년째 살아도 건강합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한센병은 정말 약한 병입니다. 1년 동안 약을 먹어야 치료되는 결핵과 달리 한센병은 3개월만 약을 먹으면 감염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2개월 내 접종하는 결핵예방접종 주사만으로도 99.9% 예방이 됩니다. 그렇게 약한 병인데도 과거 선입관 때문에 많은 한센인이 이렇게 차별 속에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소록도에서 19년 의사 오동찬, ⓒKBS1 강연100도씨
그는 아이들의 학교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주말부부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평일에는 내내 소록도에 머물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낸다.) 그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잠시 고민하던 시절에 자신의 아이에게 "아빠 소록도 나갈까?"라고 물어보았었는데, 그때 아이가 울면서 "아빠, 아빠가 나가면 그 불쌍한 소록도 할머니 할아버지 어떡해?"라고 말하였다. 그는 아이의 응원에 힘입어 아직도 소록도에 머물고 있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한센병이 이제는 따로 구분되어 차별받아야 하는 병이 아니고, 치유가 될 수 있는 병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 속에 있음에도 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들을 보며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어려운 처지에 처해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때 쉽게 그 손을 잡아주지 못한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있지만, '굳이 내가 돕지 않아도 누군가가 돕는다.', '괜히 피해 볼 수 있다'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동찬 씨 같은 분은 그 누구보다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동찬 씨 같은 분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 사람의 인생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에 아주 좋은 교훈이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분들은 한센병의 후유증으로 일생생활이 힘들지만, 매일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기뻐요'라고 말하며 삽니다. 어느 날은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한 평생을 사는데 뭐가 그렇게 감사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들께서는 "그래도 하루 눈 뜨면 숨쉴 수가 있고, 하루 세 끼 밥 먹을 수가 있는데 뭐가 불평이고 불만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분들을 통해서 정말 겸손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거 하나 제대로 배웠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주면서 산다면, 참 따뜻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오동찬 씨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오동찬 씨가 이야기한 대로 정말 따뜻한 사회가 되리라 확신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한 명, 한 명의 작은 변화로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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