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출산율은 노동자가 선택한 생존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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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 혼자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높은 부동산 가격과 반대로 우리의 임금은 그 부동산 가격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머무르면서 젊은 세대는 원룸이 아니라 영화 <기생충>에서 볼 수 있는 반지하, 혹은 이제는 지하 혹은 쪽방에 들어가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 수도권에 한하는 이야기다. 아직 지방은 수도권보다 적은 돈으로 내 집 마련 혹은 하다못해 사람이 살 수 있는 수준의 월세와 전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크더라도 여전히 높은 문화 소비 시장을 원하는 젊은 세대는 생존이 열악해도 수도권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 김해 문화의 전당에서 열린 ‘홈 리스의 도시’ 전시에서 보았던 중국 베이징에서 늘어나고 있는 쥐족 문화가 한국 서울에서도 퍼지는 것 같다. 너무나 비싼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젊은 노동자 계층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저 조건에 겨우 해당할 것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거다.



 이렇게 나 혼자도 사람다운 환경 속에서 살기 힘든 젊은 노동자 계층은 사람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서 부모님 세대가 놓친 몇 가지 기회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 기회는 바로, 혼인을 하지 않을 기회와 아이를 낳지 않을 기회 등이 그렇다. 오늘 읽은 <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에 아래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데일리뉴스>는 노동자 계급이 교육을 통해 음식물 찌꺼기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풀로 빵을 만든다든지, 잔반으로 국을 끓이는 방법이라든지.

노동자 계급이 걷어차 버린 황금 같은 기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혼인을 하지 않을 기회. 덜 사치스러운 삶을 살 기회.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지 않을 기회. 주급 15실링으로도 자본가가 될 기회. 더 변변찮은 음식으로도 목숨을 이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맬서스의 교만한 교리에 영혼을 모멸당할 기회. (본문 98)


 카를 마르크스가 <이코노미스트>와 <데일리뉴스>가 노동자를 비판한 기회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을 가한 이 기사는 우리에게 많은 걸 보여준다. 오늘날 젊은 노동자 세대는 ‘나 혼자라도’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혼인을 하지 않을 기회를 선택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혼인을 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출산율도 줄어들고 있다. 현재 한국의 출산율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1명이 채 되지 않는 0.98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출산율이 1명이 채되지 않는 수치로 줄어들기 시작한 시발점은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라는 문구를 나라에서 권장한 시기다.


 덕분에 오늘날 중년 세대부터 시작해서 젊은 세대까지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은 ‘내가 더 사치스러운 삶을 살 기회’로 여겨지면서 많은 사람이 선택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서 가족을 꾸리는 사치를 포기하고, 덜 사치스러운 삶을 살면서 나를 위해 살고자 하는 거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다르지 않다. 불안정한 수익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도 벅찬 상황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고, 사치스러운 삶을 고집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육 수준이 높아진 젊은 세대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를 읽어보면 아래의 글을 읽을 수 있다.


노동자인 부모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배움의 기회가 과연 무엇인가? <이코노미스트>는 맬서스의 계획 속도에 맞춰 자신들의 머릿수를 제한하는 방법은 배울 기회라고 말한다. 또 어떤 정치인은 교육을 받으면 ‘지저분하고 통풍이 잘 안 되는 비좁은 집에 사는 건 건강과 활력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거라 말한다. 굶어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자연의 섭리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는 꾸준한 음식 공급이 필수’라고 가르침으로써 그를 굶주림에서 구할 수 있다는 수준이 아닌가. (본문 98)


 윗글을 읽으면 오늘날 우리가 배운 교육과 부모님 세대가 전한 가치와 너무나 똑같아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머릿수를 제한하는 방법을 터득해 출산율을 줄여가고, 지저분하고 통풍이 잘 안 되는 비좁은 집에서 살지 않기 위한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 혼인율과 출산율은 노동자가 삶을 통해서 배운 그 열악한 환경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더욱 내려가게 될 것이다. 나라가 아무리 오늘날 복지 제도를 개혁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버린 정신적인 벽은 갖가지 차별을 만들어 노동자를 핍박한다.


 오늘날 새로운 신조어로 등장한 월거지, 전거지, 빌거지 등의 단어를 보면 얼마나 사람들 간의 차별이 만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성적으로 차별을 하는 모습이 비치며 논란이 되었지만, 이제는 소득 수준으로 차별을 하는 모습이 일상 속으로 들어와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지나치게 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부동산 소유자에 대한 과세의 확대하며 그것을 다시금 재분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얼마 전에 MBC <PD 수첩>에서 방송된 일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한국은 부동산을 통한 자본 축적이 너무 심하다.



 원래 ‘경제’라는 건 자본가가 생산을 위한 자본을 투자해서 노동력을 소비하고, 노동력을 공급하는 노동자가 임금을 받아서 다시 그 임금을 사용해 소비할 수 있어야 잘 돌아가는 법이다. 그런데 한국은 자본가가 자본을 노동력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부동산에 투자하기 때문에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월세, 전세, 보증금’ 등의 비용만 과다하게 요구하며 점차 노동자 계급이 몰락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노동자는 줄어든 양질의 일자리를 가지고 다투고, 최저 임금을 올리기 위해서 매해 다툰다. 향상된 생산 능력에 비해 소비 능력은 턱없어 부족해지고 있다.


현대의 강제 이주는 경우가 사뭇 다르다. 생산 능력이 부족해서 잉여 인구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생산 능력의 향상으로 인구 감소가 필요해진다. 인구의 잉여분은 기아 또는 이주를 통해 제거한다. 인구가 생산 능력을 압박하는 게 아니라 생산 능력이 인구를 압박하는 상황인 셈이다. (본문 36)


 오늘날에 기아는 발생하지 않겠지만, 점차 소비 능력이 없어지는 노동자 계층이 살아갈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적다. 적은 임금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과거 노동자 계급이 발로 차버렸다고 하는 혼인하지 않을 기회, 덜 사치스러운 삶을 살 기회를 찾아 나서고 있다. 그게 오늘날 현대 사회다.


 이번에 읽은 <더 저널리스트 카를 마르크스>라는 도서는 제1부를 통해서 카를 마르크스가 쓴 기사를 읽을 수 있고, 제2부를 통해 임금 노동과 자본에 대해 읽을 수 있다.



 옛날 그 시절의 이야기라고 해서 오늘날과 맞지 않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른 이후 마르크스가 지적한 여러 문제는 오늘날 현실이 되어 우리 젊은 노동자 계층의 선택이 되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 한국은 어떤가?’, ‘나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게 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다시금 살펴보고자 한다면, 노동자 계급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면, 노동과 자본이 가진 올바른 뜻을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더 저널리스트 카를 마르크스>라는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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