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험 기간만 되면 공부가 싫어질까
- 일상/일상 다반사
- 2018. 4. 21. 07:30
대학 중간고사를 준비하며 벌써 중간고사 이후를 준비하는 모습에 웃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가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절은 초등학교 시절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한 공부는 난이도가 어렵지 않았고, 공부한 만큼 금방 성적이 오를 수 있어 ‘성취감’이 가장 손쉽게 느낄 수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은 중학교 때까지 계속된다.
나 또한 지난날을 돌아보면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한 공부가 가장 쉬웠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는 학원에 다니더라도 내용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공부에 썩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한 만큼 시험이 너무 쉽게 느껴져서 규칙적으로 공부를 했다.
당시 학원에 다닌 영향도 컸지만, 국수사과영 과목 시험을 치를 때마다 영어는 제쳐두더라도 다른 과목에서 만점 가까이 받는 일이 즐거웠다. 시험 기간은 학교를 빨리 마칠 수 있는 데다 너무나 쉽게 시험 문제를 풀 수 있어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날이 아니었나 싶다. 역시 학교에서 빨리 마치는 건 좋은 거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공부는 아무리 하더라도 쉽게 성적이 올라가지 않아 정체 상태를 겪기 시작했고, 대학교에 올라오면 이상하게도 시험 기간을 맞아 진득하게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않는다. ‘공부 안 한다’고 말하면서 뒤에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이번 대학 중간고사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공부를 할지 대충 생각은 해뒀지만, 공부를 하기보다 또 아침 일찍부터 <보노보노의 인생 상담> 책을 짧게 읽거나 <스타크래프트> 배틀넷에 접속해 '3:3 헌터'를 즐기고 있다. 더욱이 중간고사를 치르기 전부터 나는 ‘중간고사 끝나고 할 일’ 목록을 적어두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중간고사 이후 여유가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적는 모습에서 이미 싹수가 틀려먹은 것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험은 중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자신이 수강하는 과목 수만큼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그 시절과 비교하면 여유가 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시험 기간이 되더라도 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공부를 했던 10대 시절만큼 공부를 하지 않게 된다. 물론, 시험 성적이 개판처럼 나올 때가 종종 있어 ‘헉, 공부해야 해!’라면서 기말고사에 전력투구할 때도 있지만, 전력투구한다고 해도 공부 시간은 10대 시절의 1/5도 안 된다.
학생의 신분으로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나이가 제법 들었더니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다. 특히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에 더 치중하게 되고, 공부와 관련이 없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게 행동을 한다면, 공부하고 나서 즐겨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감옥 같은 학교에 갇혀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 정답’이었던 십 대 시절 이후에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열심히 공부만 하면 다음도 똑같이 이어진다.
<보노보노의 인생 상담>의 ‘인생을 땡땡이치고 싶어요.’라는 상담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포로리 : 누가 그렇게 열심히 하라고 하는 걸까?
보노보노 : 누가?
포로리 : 으흠…….
보노보노 : 부모님하고 친구들이?
포로리 : 분명 자기 자신일걸.
보노보노 : 앗. 그런가. 역시 이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구나.
포로리 : 맞아 맞아. 남들이 그런 말하면 욱하게 되지만 자기 자신이 그런 말을 하면 신경 쓰이지. 왠지 나쁜 짓 하는 것 같아서.
보노보노 : 왜? 왜 그럴까?
포로리 : 다들 남들이 하는 말보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잘 듣거든.
(중략)
포로리 : 이 사람도 분명 마찬가지야. ‘땡땡이 치지 마’라고 자기 자신이 말해주는 거야. 그래서 ‘땡땡이 치면 안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거 아냐?
보노보노 :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포로리 : 땡땡이 안 치고 잘하면 또 하나의 자신이 칭찬해줄 거야.
보노보노 : 땡땡이치면?
포로리 : 그래도 이해해줄 거라고 봐.
보노보노 : 땡땡이쳐도 이해해주는 구나.
포로리 : 하지만 계속 땡떙이만 치면 어떻게 될지는 몰라.
보노보노 : 그럼 어떻게 되는데?
포로리 : 또 하나의 자신이 없어질지도 몰라.
보노보노 : 또 하나의 자신이 없어질 때도 있어?
포로리 : 있을 거라고 봐. 내가 또 하나의 자신이 하는 말을 전혀 안 들을 때. 그리고 나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 따위 없을 때. 나에 대해서고 뭐고 다 모르겠을 때 말이야. 바로 진짜 혼자가 돼버렸을 때지.
보노보노 : 그런 거 싫어. 왠지 또 슬퍼졌어.
포로리 : 응, 포로리도. (본문 19)
위에서 언급한 보노보노와 포로리의 대화를 읽어보면, 우리가 땡땡이를 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만 해야 하는’ 모습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노력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 즉 땡땡이를 치는 건 금기 중 하나였다.
끊임없이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서 살아온 우리는 땡땡이 피울 시간이 필요하다. 짧게라도 잠시 땡땡이를 치면서 나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를 가지는 일도 열심히 노력하는 시간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그런 시간을 가리켜 ‘자투리 시간’이라고 가리키며 뭐라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노력’이라는 단어에 반항심을 가지게 되고, 10대 시절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해야 하는 때가 오면 질려버리는 게 아닐까?
시험 기간을 맞아 공부하는 일은 당연하다. 너무나도 그 당연한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자그만한 저항은 잠시나마 공부할 시간에 땡땡이를 피우는 일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시험이 대학 입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이음매 역할을 했고, 주변에서도 노는 아이 없이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서 보니 ‘공부만 하는 학생’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는 학생’이 더 흐드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교수님도 자주 “대학은 공부만 하는 장소가 아니다. 사람을 사귀고, 해보고 싶은 다양한 일을 해봐야 하는 장소다.”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그 말이 맞다.
좋은 학점을 받아 졸업을 하는 것은 분명히 취업에 도움이 되겠지만,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하는 나만의 독특한 경험을 통해 결과를 만드는 것도 큰 도움이 되는 법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더는 똑같은 일만 해서는 잘 살 수 없는 시대다. 시험 기간만 되면 공부가 싫어지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닐까?
공부, 공부, 공부, 공부. 우리는 너무나 공부만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것도 우리가 들은 공부는 오로지 시험공부 뿐이다. 이제는 시험공부에서 벗어나 나에 대한 공부, 인생 공부를 해보자. 혹은 ‘연애 공부’를 해보는 일도 나쁘지 않다. 우리의 봄은 시험이 끝난 이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시험공부를 아예 하지 말자는 건 아니다. 적당히 시험공부를 하면서 ‘노력했음’을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는 수준의 결과를 유지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또 하나의 나만 아니라 곁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응원해줄 것이다. 오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짧게 글을 쓰고 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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