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나리아, 돈 잘 버는 인간이 그렇게 대단해?

반응형

우리는 모두 바쁘게 알찬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누구나 공백을 마주하게 된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서 복잡한 것은 싫었다. 단순하게 삶을 살면서 단순한 인간관계 속에서 누구와 마찰을 빚는 일 없이 조용히 살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싫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고, 그런 곳에 억지로 있노라면 매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공백이 되었다.


 공백. 우리는 아무것도 차지 않은 공간을 공백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에서 공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몇 번이나 있을까. 사람들은 삶에 공백이 있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고,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는 세상 속에서 혼자 놓이는 것이 두려워 억지로 소음 사이에 자신의 몸을 들이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삶을 억지로 유지하더라도 마주하게 되는 공백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 '도대체 저게 뭐가 재미있다고 떠드는 거야?' '너희는 그게 그렇게 재미있냐?' 같은 방식으로 앞에 있는 사람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책하거나 지나치게 타인을 부정적으로 본다.


 소설 <플라나리아>는 책의 제목부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플라나리아는 어릴 때 생물 수업 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는 생물의 이름이다. 플라나리아는 몇 번이나 몸체를 잘라도 다시 잘린 덩어리가 하나의 개체가 되는 재생력이 무척 뛰어난 생물이다. 이런 생물이 제목이라 상당히 흥미가 당겼다.


플라나리아, ⓒ노지


 <플라나리아>는 다섯 편의 단편을 엮은 작품이다. 이 다섯 편의 작품은 앞서 내가 말한 '공백'이라는 말의 의미를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인물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평범히 살아가면서도 그곳에서 전혀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공백에서 엇나간 삶을 건조하게 잘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첫 이야기 '플라나리아'는 유방암 수술 이후 삶을 살아가는 데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플라나리아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암에 걸렸던 자신을 사회 부적응자라 스스로 말하기도 하는데, 개인의 내적 갈등이 정말 잘 그려져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 '네이키드'는 성공을 위해서, 세상이 가장 평이하게 말하는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살다가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버린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에도 잠재되어있을 작은 욕망과 그곳에서 느끼는 허무를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세 번째 이야기 '어딘가가 아닌 여기', 네 번째 이야기 '죄수의 딜레마', 다섯 번째 이야기 '사랑 있는 내일'은 모두 사람의 외면으로 드러나는 욕심과 내면에서 끊임없이 외부적 상황으로 이어지는 딜레마를 겪게 하는 공백을 다룬다. 여백 없이 빡빡하게 채운 것 같은 삶에 남은 공백은 지독했다.


십 대 때부터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 위로 위로 나아가고 싶었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승자가 되고 싶었다. 무턱대고 이기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예전의 나는 이제 너무 지쳐 잠시 잠들어있는 것일까. 아니면 여태껏 억지를 쓰며 살아왔을 뿐, 사실은 게을러빠진 지금의 내가 진짜 나인 걸까. 실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본문 87)


공백의 교실, ⓒ노지


 나는 책을 읽으면서 기억나지 않는 지난날을 돌아보기도 했고, 학생들의 대화 소리로 한껏 소란스러운 대학 건물 복도에서 혼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비춰보기도 했다. 소음으로 가득한 곳에서도 공백은 반드시 존재한다. 공백은 끊임없이 소음 속에서 우리는 괴롭히는 존재이며, 나를 보게 하는 존재다.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문득 그런 질문을 해보았다. 책의 등장인물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을 하기도 하고, 섹스를 하기도 하고,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마음에 생긴 공백을 채우지 못했다. 비전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서?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그 질문에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다. 아마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사는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공백은 언제나 우리 근처에 있다. 친한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더라도 우리는 '대체 내가 왜 이 짓을 하지? 무슨 가치가 있어?'라는 공백을 피할 수 없다.


 먼저 삶을 산 사람들이 그 공백이 가져다주는 괴로움과 따분함을 이겨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취미 생활도 하고, 여행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하지 못한 도전도 하는 거라고 말한다. <플라나리아> 소설은 그런 일반적인 의견에 되묻는다. "그게 그렇게 대단해? 대단하냐고?"


 주인공들의 심리를 따라가며 반항적인 질문을 몇 번이나 해보았다. 돈을 잘 버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 사람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홀로 보내야 할 남은 시간을 떠올리니 참 괴롭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만난 건 우연의 인연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마주한 공백에 괴로움이 아닌 고요함을 느끼고 있다. 모두가 소음에 빠져 색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새하얗게 남아있을 수 있다며 안심했다. 나의 공백은 소음에 긁히지 않는, 욕심에 더럽혀지지 않고 싶다. 소음이 가득한 이곳에서 하늘의 구름을 올려보며 그렇게 공백이 된다.


 그렇게 공백 그 자체로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삶 속에서 무엇을 잃어버린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 소설 <플라나리아>를 소개해주고 싶다. 주인공들이 정처 없이 제 공백을 떠도는 이야기는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응형
그리드형(광고전용)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