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생 이준석이 말하는 1등과 리더의 차이점
- 문화/문화와 방송
- 2015. 11. 11. 07:30
좁게 보지 말고, 넓게 보아야 우리는 삶을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내일이면 한국의 많은 학생이 오랜 시간을 투자한 최종 시험을 치르는 수능 시험 날이다. 어릴 때의 나도 그랬지만, 수능 시험에서 높은 점수는 최종 목표나 다름없었다. 좋은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 오직 1등을 향해서 달렸던 시기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학교에 올라가게 되면 그런 환상은 순식간에 깨진다. 지금 2015년에 살아가는 많은 수험생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학만 간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은 또 하나의 끝이 없는 경쟁의 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더 좋은 대학에 가고자 열을 올리고 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1등을 하는 것이야말로 출발선을 좀 더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은 학벌을 가져야 취업에 유리하고, 좋은 스펙을 가져야 상류층에 끼어들 수 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은 채, 오직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왜?'라는 질문 없이 열심히 살기만 해서 우리는 삶을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직 타인이 말하는 객관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보면 올바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인 목표와 뒤떨어진 열심히 사는 삶은 절대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얼마 전에 재방송으로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 편을 보았다. 마지막 편에 출연한 하버드생 이준석 씨가 말해주는 여러 이야기는 현재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좋은 대학과 좋은 스펙 등을 쫓는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주 좋은 이야기였다.
이준석 씨는 1등과 리더의 차이는 "1등은 정해진 기준 내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낸 것이고, 리더는 내가 어떤 집단을 이끌었을 때 더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다."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1등은 단지 정해진 기준을 만족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정답에 가깝지만, 꼭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1등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경쟁해야 하는 곳에서 이왕이면 1등을 하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통해 이유를 알지 못하는 추구는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준석 씨는 "하버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왜 공부하는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에서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의 사례를 통해서 '한 집단의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의 특징'과 함께 넓고 유연한 사고를 강조했다. 인생에서 승자는 1등을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비록 작더라도 세상을 바꾼 경험이 많은 사람이 승자라고 말했다.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사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어떤 집단에 속해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목표에 선한 의지와 마땅한 도리가 있다면, 주변 사람에게 비전을 심어줄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을 얻을 수 있고, 변화를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조건 도전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한 도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준석 씨는 자신이 과거 조금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에 분명한 자기 책임을 졌기에 부모님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지금 자신이 하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도전 또한 그래서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이준석 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우리가 어쩌면 맹목적으로 한 집단 내의 1등을 추구하는 것은 타인의 기준을 채우는 것이 가장 책임을 덜 지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다른 길을 가게 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몫인데 우리는 그런 데에 익숙하지 못하니까.
남이 정한 기준에서 1등을 쫓아가다 고꾸라지면, 우리는 '나는 금수저가 아니라서 애초에 저기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변명할 수 있고, 사회 제도에 불평불만을 토해낼 수 있다. 하지만 남과 다른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우리는 똑바로 걷거나 뛰지 못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마음 깊이 원해서 하는 것인가? 이것이 내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로 가는 길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소녀와 '이 대학에 합격한 나, 근사하지? 부모가 날 자랑스러워하는가? 친구들이 날 부러워하는가? 스펙을 올리려면 이것이 필요하겠지? 자격증 많으면 좋은 거니까' 타인의 시선에 치중한 또 한 소녀, 위에 말한 두 소녀는 '나의 오늘'에 대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달랐다.
'질문'을 들으면 그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깊이'가 보인다.
시간을 들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 자신의 생각에 연결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그만큼의 깊이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면 시간을 쏟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쏟아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그만큼의 애정을 갖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질문을 받는 상대방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공을 들여 의미 있는 답을 하고자 애쓰게 되기 마련이다. 반면 얄팍한 질문을 던지고, 빨간 연필 선생님처럼 시험문제에 정답을 달아주거나 빨간 펜으로 표시해달라는 사람이라면, 그에 걸맞은 답을 얻어갈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해야 할 숙제와 고민을 영원히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부딪혀보는 방법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스스로 생각하고 가치를 만드는 것 이외에는 기계로 대체되는 시대. 주어지는 매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기회의 시기가 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쌓아가는 사람에게는 절망의 시기가 될 것 같다.
_ 두 소녀 이야기 / 스스로 답을 찾는 교육에 관해 中 (출처 : 허핑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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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은 교육은 제 일에 책임을 지는 경험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 우리는 정해진 집단 내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1등을 해야 하는 고집스러운 교육을 반복해서 받았다. 거기에 반항하게 되면, 우리는 못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도 수학 문제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어쩌면 이준석 씨가 말한 '왜 공부하는지' 이유를 아는 것과 '누가 가장 재미있게 살았는가'를 삶의 중요한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서 적은 게 아닐까? 꿈을 꾸려고 해도 우리의 환경은 꿈이 아니라 실질적인 명분과 이윤을 추구하도록 강요한다. 이곳에서 이상과 꿈을 말하는 건 비정상이다.
갇힌 장소와 좁은 시야를 한사코 고집하게 되면, 만들어지는 것은 오직 독재자뿐이다. 지금 한국의 모습을 보라. 한국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갑의 횡포는 기업과 노동자, 사람과 사람, 고객과 직원 사이에 만연하고 있다. 1등 지상주의의 폐해다.
지난 한일전 야구 경기에서 이승엽은 "일본은 모든 환경을 갖춰 놓고, 선수가 기량만 발휘하면 되도록 해줍니다. "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한국과 일본에서 나타나는 두터운 차이점이었다. 일본은 야구뿐만 아니라 사회 상당수 부분이 그렇다. 우리는 일본이라고 욕만 하지 말고, 이런 부분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1등이 아니라 진짜 리더를 기를 수 있는 학교, 사회, 학교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국정 교과서 같은 사고를 획일화하는 시도를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넓고 개방적인 시선으로 우리 사회 문제에 접근하여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야 진짜 경쟁력을 가진 창조적 리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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