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도전은 권리인가요, 의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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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은 분명히 매력적이지만, 우리에게 희망인가 혹은 희망 고문인가?


 추석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수요일이다. 추석 연휴 동안 재미있는 추억이 쌓인 사람이 있을 것이고, 오랜만에 만난 친·인척 사이에서 '누가 어떤 대학에 갔다더라' '누가 어떤 대학을 나왔는데도 취업을 못 했다고 하더라' 등의 이야기를 듣느라 맥이 빠진 사람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추석을 집에서 보내면서 딱히 그런 일은 없었는데, TV를 통해 보았던 <청춘 응원 콘서트>가 꽤 기억에 남는다. 우연히 시청한 <청춘 응원 콘서트> 프로그램은 성공한 몇 명의 사람이 나와서 우리 청춘에게 작은 조언을 해주면서 자신의 일화를 들려주는 토크 콘서트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청춘 응원 콘서트> 프로그램에 나왔던 사람들은 모두 남들이 가는 똑같은 방향이 아니라 무턱대고 방향을 틀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방송에서 청춘에게 했던 조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 "최선을 다해서 도전하라."이라는 말이 주제라고 생각한다.


ⓒ꿈꾸라 도전하라


 도전. 솔직히 말은 정말 멋진 말이다. 도전하지 못하는 삶은 정말 재미없는 삶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전을 통해서 어떤 것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감정을 최고의 감정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몸속의 아드레날린이 대량 분출되는 어려움을 딛고, 목표를 이루는 도전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우리가 스카이다이빙을 하거나 산에 올라가거나 등 다양한 도전을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내가 임의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성취하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다. 도전은 그 자체로 빛이 나고, 도전을 통해서 우리는 허무가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쉽사리 도전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한다. 왜냐하면, 도전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도전을 했다가 우리는 실패를 해버릴 수도 있다. 남들이 '안 돼.'이라고 말했던 길을 선택했다가 많은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려 낙오자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도전은 빛나면서도 무섭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함께 껴안고 있어서 그렇게 빛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도전은 언제부터 우리 청춘의 과제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권리'라고 말해야 할지, 혹은 '의무'라고 말해야 할지 애매한 위치에 놓여버렸다. 과연 도전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도전


 <청춘 응원 콘서트>에 등장했던 여러 사람은 모두 공통으로 도전을 강조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그런 도전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우리 세대는 도전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 사회는 정해진 무대 위에서 똑같은 일을 통해서 경쟁할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어 있으니까.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이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풍,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 가능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 0퍼센트에 가까워야 한다.

즉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본문 196, 표백)


 많은 청춘이 이런 토크 콘서트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답답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을 얻으려고 하지만, 매번 '도전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쉽사리 도전하지 못한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혹은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 하는 일을 '도전'이라고 하지 다른 건 도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삶에 목을 매는 어른들은 언제나 '일단 먼저 취업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문제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먼저 취업을 한다고 해서 나중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매번 야근과 직장 스트레스를 겪느라 속이 상하거나 머리카락이 빠질 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무작정 뛰어드는 것을 우리는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이라고 말한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일이 인생에서 최우선 과제였던 우리 청춘에게 '도전'이라는 단어는 이미 도전의 뜻을 가지지 못한다. 그냥 우리는 현실적인 도전을 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 상황에서 우리는 도전을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먼저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분명 <청춘 응원 콘서트>에 나온 사람들은 도전을 통해서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결과를 얻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도전'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도 곧장 행동으로 우리가 옮길 수 없는 이유는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순위 경쟁을 강요당했고, 수치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삶을 살아왔다. 과연 거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수치가 높지 않더라도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건 어디까지 개인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도전이라는 말은 두 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통해 주변 환경을 바꿔나가는 도전,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주변의 기대와 형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대기업 취업이나 공무원을 향해 가는 도전. 이 두 개의 도전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도전을 선택해야 하고, 어떤 도전을 좀 더 힘주어서 말해야 할까? 전자의 도전을 선택한 나이지만, 나는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거기에 분명한 '자기 이유'가 있다면, 충분히 우리는 도전을 권리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오늘 당신은 도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순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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