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문학가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 문화/독서와 기록
- 2015. 7. 20. 07:30
고된 삶의 여정이 드러나는 편지에서 그 문학을 만나다.
올해로 25살이 되어버린 나는 손편지보다 스마트폰으로 보내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익숙한 세대다. 이메일의 개념이 한국에 전해지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손으로 쓰는 편지를 언제나 주고받았고, 남몰래 가진 사랑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 연애편지를 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어른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냄새가 나는 편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젊은 세대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다. 단순히 내가 머리로 이해하는 편지는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글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쉽게 하지 못하고, 좀 더 솔직한 감정을 글로 옮기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요즘 젊은 세대가 솔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비록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사귀자', '헤어지자' 등의 말을 주고받는 가벼운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영상 촬영을 통해 이전과 달리 좀 더 시각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목요일(16일)에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인과 사귀는 영국 여성의 사연을 접할 수 있었다. 펜팔로 만난 두 사람은 겨우 2주 동안 영국에서 만났지만, 서로에게 사랑하게 되었다. 한국 남성이 군대에 가 있는 2년 동안 그를 기다리다 마침내 영국 공항에서 재회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편지를 쓰지 않아도 요즘 세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괜히 유튜브 영상을 통해 사랑을 고백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스마트폰으로 환경 자체가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는 종종 손편지를 쓸 때가 있다. 여전히 군대에 가는 한국 남성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와 연인이 손편지로 안부를 묻거나 전하는 것처럼, 첫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직접 손으로 쓴 편지와 글로 전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진심이다. 그리고 진심은 그저 화려한 말솜씨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손으로 삐뚤삐뚤 쓴 짧은 글에서 더 애틋하게 담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손으로 직접 메시지 카드를 쓰거나 반성문을 작성할 때도 늘 손으로 쓰도록 훈계를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편지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단순히 연락용으로 사용되던 편지가 사람의 안부를 전하는 편지가 되고,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가 되고… 편지가 없었다면 그 시절의 애틋한 사랑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편지는 모든 게 전자 문서로 바꾸기 전까지 사람에게 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노지
오늘 갑작스레 오래된 '편지'이라는 단어를 말한 이유는 오늘 소개하려는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이라는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에세이로,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기분이었다.
나는 솔직히 책을 읽기 전까지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니,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동안 권정생 선생님이 '강아지 똥'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오덕 선생님은 권전생 선생님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도와준 지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딱 맞는 두 사람이었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를 통해 읽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 속에서 동화 '강아지 똥'의 등장인물이 처음에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권전생 선생님이 얼마나 힘겹게 글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저의 동화를 자꾸 좋게 보시려 하는데, 저는 아직 만족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제 역량 가지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것 같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일인(日人) 작가들의 작품을 능가할 수 있는 동화를 단 한 편이라도 쓰고 싶어요.
배우지 못한 것이 제일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도 사전을 펼쳐 놓고 봐야 되니, 글 한 편 쓰는 데야 말할 나위 없지요. 그래도 자꾸 틀립니다. 어려운 말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쉬운 말로 쓰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계속 글은 쓰겠습니다. 앉아서 배길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무엇이곤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니까요. 아무와 얘기할 것이 없으니, 자연 책에 눈이 가고, 하고 싶은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지요.
세종문화사와는 공식적인 계약서가 없어도, 책만 팔리게 되면 적당히 생각할 테지요. 제 생각에도 그다지 기대는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편지를 읽어 봐도 영 제 생각과는 엉뚱한 서신을 받을 때는 오히려 실망할 지경이니까요. 그토록 많은 편지 가운데, 단 몇 장이나 진짜 편지가 있을지? 가려내 보면 한심할 거예요.
선생님,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p61)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부분에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대단하다' '나는 이런 자세로 한 번이라도 글을 써본 적이 있는가?'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글을 쓰면서 블로그에 올리는 삶이 '내 삶'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권전생 선생님처럼 절실하게 한 편의 글을 써본 적이 없어 부끄러웠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권전생 선생님께서는 글을 통해 일본 사람보다 더 좋은 동화를 쓰고 싶어 하셨고, 평생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셨으니까. 마음속에 품은 본질이 너무 다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방향은 오직 블로그를 통해 내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그런 부분을 비교하면 당연히 글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의 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그 사람의 인간 혼이 얼마나 깊이 있는가에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권전생 선생님의 순도 깊은 문학은 선생님이 가진 선한 영혼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노지
책을 읽는 동안 문득 '나는 이렇게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지탱해주는 친구가 있는가?', '내가 어떤 사람에게 감사 혹은 특별한 감정을 전하고자 편지를 쓴 적이 있는가?' 등의 질문을 해보았다. 이윽고 나는 역시나 어정쩡하게 '잘… 모르겠다.'는 답을 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가 한 명 있었고, 쓸데없는 말을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주고받는 친구가 한 명 있고, 가끔 연락해도 아무렇지 않게 답해주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리고 연락처에 등록은 되어 있지만, 평소에 종종 이야기하지 않아도 안부를 물으면 답해주는 사람도 있기는 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는지 묻는다면 확실히 답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내가 부족하므로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막상- 이런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대체로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의 연락처를 훑어보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지 않을까?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가벼워진 것이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서로 진실함을 담아 존경하거나 함께 하는 사람을 사귈 기회가 줄어든 탓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친구를 경쟁자로 만들고, 사회에서도 술을 마시며 취하지 않는 이상 친구라 부르기 어렵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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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니 친구가 별로 없다고 말하는 나 같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즐기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건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신세 한탄을 할 수 있는 친구보다 우리가 진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친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는 제목 그대로 편지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오덕 선생님과 권전생 선생님의 아름다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편지 속에서 느껴지는 존경 그 이상을 읽으며 나는 현실에서 점차 사라지는 진실한 존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책을 만나볼 기회가 있다면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는 동시에 가끔 친한 사람에게 편지 한 통을 써보는 일도 권하고 싶다.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실천해야 하는데, 역시 사람은 머리로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게 더 어렵다. (아아, 이러니 내가 아직 일본 펜팔 친구를 만들지 못하지. 에휴)
마지막으로 책에 기록된 권전생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를 옮겨본다. 내가 이 마지막 편지를 옮기는 이유는 진실한 존경이 드러나는 동시에 학교에 대한 한탄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이라는 말이 그냥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맴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식인 선언에 서명을 하려니까 이상합니다. 저는 지식인도 아니고 깨끗하게 살아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신 것이니 할 수 없이 이름 써서 보냅니다.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을 들어 봐도 모두 왜 그렇게나 권력에 집착하는지 서글픈 생각만 듭니다. 어쨌든 한 표 찍어야 할 텐데 좀 덜 악한 사람이 누굴까 찾아내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이지호 교수의 글 읽었습니다. 세상엔 생각도 느낌도 다르게 보는 사람도 있으니 별로 감정 상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살아온 것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북극지방 사람들은 세상은 춥다 할 것이고, 열대지방 사람들은 세상이 덥다고 할테니 그걸 나무라서 어쩌겠습니까.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못 합니다. 선생님도 앞으로 그리 생각하시면 편해질 것입니다.
이제야 세상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빨리 달려가면 버스 좌석을 차지할 수 있고, 늦게 가더라도 새치기를 하거나 완력을 써서 차지하기도 할 테고요.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열두 살 아이가 자살을 할까요? 그 아이한테는 교육이 오히려 죽음을 가져다 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추위에 건강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2002년 11월 28일 , 권정생 올림. (p362)
- 허핑턴 포스트 : 군대 간 한국인 남친과 2년 만에 재회한 감동의 순간 http://goo.gl/btCZUV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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