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고독을 맛보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반응형

아이슬란드의 자연과 사람 사는 도시에서 느낀 고독을 담은 여행기


 오늘 내가 사는 김해에는 긴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전국에 걸쳐 내린다는 장맛비이지만, 가뭄이 심각한 중부 지방에는 큰비가 여전히 내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남부 지방도 4대강 사업으로 녹조 현상이 심해서 긴 장맛비가 다행으로 여겨지지만, 중부 지방에서도 꼭 큰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장마가 가져다주는 한국 특유의 습함을 머금은 더위는 불쾌지수를 높이지만, 빗소리가 들려주는 음은 여전히 기분이 좋은 소리다. 우산을 쓰고 듣는 빗소리, 선풍기 한 개를 틀어 놓고 책상에 앉아서 듣는 빗소리, 창문 밖으로 퍼지는 빗방울을 보며 듣는 빗소리는 잠시 쉴 수 있는 휴식 시간 같다.


 우리는 언제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일시 정지' 버튼 없이 살지만, 우리는 때때로 잠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을 때가 있다. 실연을 당했을 때, 실패했을 때, 아플 때, 외로울 때, 적막할 때 등 그 경우가 다양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아무리 강한 사람으로 있으려고 해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이고, 언제나 약해도 종종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도 움직여서 아픈 눈물을 가진 이별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답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고독 아이슬란드, ⓒ노지


세상의 모든 고독 아이슬란드, ⓒ노지


 얼마 전에 <세상의 모든 고독 아이슬란드>이라는 책을 통해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는 이준오 씨의 여행 에세이를 읽어볼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북대서양의 작은 섬나라로, 영국과 덴마크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화산 활동이 아직도 활발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비 오는 날에 읽는 여행 에세이는 한층 더 '떠나고 싶다'는 갈증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비 오는 날에 라면을 후루룩 마신 뒤,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싶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여운에 빠지는 것도 좋지만,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에 훌쩍 떠나고 싶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그런 기분 속에서 읽은 이 여행 에세이는 상당히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지랑이 같은 감성이 묻어나는 사진과 글은 책을 읽는 동안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일시 정지' 버튼을 손으로 꾹 누를 수 있게 해주었다.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글과 사진이 그 일부분이다.


여행 내내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둑어둑할 때 본 곳은 이튿날 해가 떴을 때 꼭 다시 둘러보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길고 긴 이동을 반복하는 이 여행에서 시간의 변화에 따른 풍경을 지켜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구석구석 먼지를 닦듯 이곳의 모습을 꼼꼼히 담아두고 싶었다. 친절하고 따뜻했던 게스트하우스의 사람들과 손을 흔들며 이별하고 동쪽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아이슬란드를 한 바퀴 도는 링로드 투어는 매일매일이 이별하는 일과 같았는지도 모른다. 어제의 풍경과, 바람과, 몇 안 되는 만남들과 끊임없이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이곳은 영원히 존재하는 곳이지만 나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되돌아가고 싶어도 겨울의 짧은 해는 나의 망설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어두워지기 전에 다음 숙소를 향해 달리는 여행. 차창의 풍경과 나 자신에만 집중하는 여행이다.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길 위에선 또 새로운 아름다움들이 펼쳐지겠지만 그것은 어제와는 다르다. 나는 이미 어제와 이별했으며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p82)



 그런데 이런 여행 에세이는 아주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 단점은 정말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든다는 점이다. 대리 만족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책을 읽는 도중 구글에서 검색을 해보고, 책장 서랍 안에 있는 여권을 꺼내서 유효 기간을 확인하는 일을 벌인다.


 문득 나도 생각해본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어디로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매해 넣고 있는 적금을 해제하고, 아직 만료 기간이 더 길게 남은 보험에서 대출을 받아 '일단, 여행을 떠나고 오겠습니다.'이라며 밖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삶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훌쩍 떠나는 여행은 돈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준오 씨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아이슬란드가 보여준 풍경과 고독에 마음이 젖으면서도 잠시 우울해지는 이유가 그 탓이다.


매일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혹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목적지 없는 길을 터덜거리며 눈에 익숙해져 가는 거리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낭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저 무뚝뚝한 고양이 놈을 지켜보는 일에 하루를 다 쓴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쫓고 쫓기며 살아온 어느 도시인의 철부지 같은 보상 심리였을 수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분명히 나는 마하의 속도로 달려가는 서울의 시간에 맞추려 다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수없이 겪었던 '시간이 멈추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나는 이곳에서 내가 원하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되었다. 대자연에게서 얻은 선물들 중 하나다. 나는 언제든 남들이 달려 나가는 시간 따위 개의치 않고 내 시간 안에서 머물 수 있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 앞이 아니더라도. 반쯤 남은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던 카페의 창가 자리에서, 출국 수속을 할 때까지 이 옷을 살까 말까 망설였던 공항의 66노스 매장 안에서, 주인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기 시작한 핫도그 노점 앞에서 나는 언제든 시간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면 고맙게도 이 도시는 나를 따라 멈추어주었다. (p222)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나는 잠시 우산을 쓰고 비 오는 거리를 걸었다. 오직 빗방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미끄럼틀을 타는 놀이터도 보았고, 비를 피해 나무에 숨어 있는 새들이 나누는 수다도 들었고, 차들이 지나가면서 만드는 물웅덩이가 퍼지는 소리도 들었다. 비의 세계로 떠난 여행이었다.


 <세상의 모든 고독 아이슬란드> 책을 읽는 동안 그곳의 조용하면서도 바뀌지 않는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주변의 일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내가 사는 도시 김해는 아직 서울처럼 변화가 빠르지 않아 단골집이 남아있지만, 언젠가 변한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책에서 "자본이 예술과 문화를 망치고 있다."는 아이슬란드의 어떤 사람이 남긴 글자를 읽을 수 있었는데, 이 말은 지금 우리 현실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서울 홍대의 예술과 문화는 이미 자본에 침식당해 그 형태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글을 읽는 당신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과 문화를 좋아하는 가난한 소시민이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보이지 않는 풍경과 이야기가 있는 책을 읽는 일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책을 읽는다.



반응형
그리드형(광고전용)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