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나는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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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으며 내가 글을 쓴 계기를 떠올리다


 처음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글을 썼던 때는 언제였을까? 아마 중학교 시절에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단순히 나는 남들 앞에서 과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보통 어떤 아이가 처음 글을 쓰는 때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강요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과제로 매일 일기장을 써오라고 하고,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하고, 숙제로 책을 읽고 독서 감상문을 써오라고 한다. 아마 대체로 처음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접하는 일은 이런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시작하는 글쓰기는 '내 글쓰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 글쓰기에는 '내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이유가 없다면 그건 내가 쓴 글이 아니다. 단순히 숙제와 의무를 하기 위해 연필을 닳게 할 뿐이다.


 처음 내가 내 의지로 썼던 글에는 어릴 때부터 항상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았었다. 물질적 가치를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를 비꼬았고, 남을 괴롭히면서도 자각을 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의 모습을 비판했다. 왜냐하면, 어릴 적에 내가 겪은 세상의 모습이 그랬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은 처음 자신의 의지를 갖추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때는 바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쓸 때라고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 편지를 쓰기 위해서 단어를 고르는 모습을 상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지만, 나는 전혀 그런 동기가 아니었다.


나라가 이 모양이에요, ⓒ아이엠피터


 처음 내가 의지를 갖고 쓴 글에는 한탄과 비난만이 가득했다. 세상을 향해 욕을 했고,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며 하루하루 연명해야 하는 삶에 대해 저주했었다. 겨우 초등학생이, 겨우 중학생이 무슨 세상에 그렇게 불만이 으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의 나는 속에 오직 독기만 품고 있었다.


 독기만 가득했던 내 글은 '단순히 강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글에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알게 되어 변하기 시작했다.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사회를 풍자하여 비판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글의 모습을 조금씩 가다듬기 시작했던 거다.


 그리고 처음 그렇게 다듬어 접근한 글로 지역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도 상을 받기도 했다. 이건 잠시 자랑하려고 한 말이다. 당시 상을 받았음에도 나는 내 글이 좋은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도 나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너무 나 자신을 향해 부족하다고 말하기만 하면 주눅이 든다. 그래서 나는 종종 글이 좋지 않다는 비평을 들을 때마다 과거에 좋은 글로 선정된 글을 보며 '그래도 개선의 여지는 있다.'고 믿으면서 조금 더 내가 쓰는 글에 자신을 갖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오늘 이 글도 그렇게 나를 응원하는 글일지도.


 오늘 글쓰기에 관해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알라딘 서평단으로 만난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이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서평단으로 만난 책이라 책을 소개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먼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던 이야기로 서평을 쓰고자 했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노지


 이 책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는 작가 한창훈이 거주하는 남쪽 섬에서, 그리고 그가 겪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책의 제목에 쓰인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해 직설적인 대답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그의 삶을 채웠는지 읽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글에는 언제나 그 사람의 삶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글의 문체가 다르고, 풍기는 냄새가 다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소설가, 시인… 즉 소위 말하는 문학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삶을 살면서 소박한 맛을 알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뭐, 고작 26살의 내가 말하기는 뭣하지만 나도 솔직히 내 인생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문학가가 될 수 없었고, 앞으로도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겪은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 자체가 문학가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수긍이 아니라 언제나 반항을 했다. (재능도 없고,)


 그래서 내가 처음 내 의지로, 내가 전하고 싶은 의도를 가진 글이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백일장 대회에서 나온 '안개'라는 소재를 통해 뿌옇게 흐려진 안개 같은 우리 사회의 양심과 비통한 눈물을 이야기했었는데, 그 글로 상을 받게 된 것이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책을 읽어보면 어떤 남자아이나 생각해보았을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키스를 하고 싶다는 감정이라던가, 자신이 지내던 마을의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라던가, 알고 지내는 다른 문학가의 이야기가 있다. 평생을 가더라도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 않을까?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딱 꼬집어서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피식'하며 웃음이 나온 부분도 있었고, '옛날에는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고 생각하며 읽은 부분도 있었고, '나는 과연 언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키스할래?'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는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웃긴 생각을 했던 부분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그냥 읽는 것으로 충분한 이야기에 어떤 의미를 담아 글을 연재해야 한다는 일이 말이다. 처음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시하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인데, 이런 책을 읽다 보면 좀 더 일상 속의 행복을 말하고 싶어진다.


 작가가 사는 남쪽 바다의 냄새와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나쁜 기억밖에 나지 않던 어릴 적의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괜히 내가 미안했던 일도 있었고, 남에게 함부로 말하기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아무쪼록 오늘 내 글을 읽는 사람이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이라는 책의 제목을 알고, 글을 쓰기 시작한 내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나는 어떤 글을 과거에 썼었지?'이라는 질문 한 가지만 할 수 있으면 나는 충분히 소득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떤 이야기라도 모두 자신의 이야기로 완성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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