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외치더라도 정의는 없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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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서로 다른 '정의'가 마찰음을 내는 곳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면서 혁신, 혁명 등으로 부르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발전해왔다. 새로운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은 기존 지식인에게 차가운 대접을 받았지만, 그 대접 속에서도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 포기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현재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가치가 생겨나고, 똑같은 일을 두고 서로 너무 판이한 시선으로 보는 일이 흔해지면서 우리는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굳이 그 범위를 '전 세계'정도로 크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런 모습을 정말 쉽게 볼 수 있다. 정치, 사회, 교육, 연애 등 어느 분야든지.


 얼마 전에 일본 프로야구팀 한신에서 마무리 투수로 뛰는 오승환 선수가 한국 걸그룹 시대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소녀시대 멤버 유리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이 보도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정말? 대단한 조합이다.'라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완구 사건 덮으려고 하네!'라고 말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서 나타나는 결과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그 사건을 보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여기고 있는가에 따라 해석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지금, 우리 한국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가치 충돌은 바로 '세월호 인양과 특별법'이 관여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세월호, ⓒ오마이뉴스


 많은 유가족이 그렇게 원하던 세월호 특별법이 발의되었지만, 이름만 '특별법'이지 제대로 조사할 수 있는 권리가 하나도 없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 마치 쓰레기로 버릴 A4용지에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문장 하나만 추가해서 통과시킨 법안이라고 말하면서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주장한다.


 하지만 유가족을 길에 무수히 떨어져 있는 먼지만큼도 보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최측근은 그런 의견을 듣지도 않는다. 그저 '세월호 인양에 드는 비용'에 대해 계산하는 척하며 경제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비용 문제를 언급하면서 세월호 인양에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고자 움직일 뿐이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진심으로 세월호 인양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더 빨리 인양 계획을 발표해서 정부 주도로 지금 단계를 밟아가면서 이루어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성완종 리스트 사건이 터지자 부정적으로 가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서 해외순방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마치 사극 <징비록>에 나오는 선조가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도를 버리고 파천하는 것만 걱정하는 것처럼 도망을 치더라도 있는 척은 다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더욱이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군주는 측근의 빛깔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니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좋겠는가' 선조, ⓒ징비록 KBS


 소위 사람들이 '좌측'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대체로 이런 생각이지만, 소위 사람들이 '우측'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전면적으로 이런 의견을 반대한다. 세월호는 그냥 단순한 교통사고에 불과하며, 거기에 나라가 이 이상 나서서 더 할 일은 없다면서 유족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번 사건의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시민과 유족들에게 이미 진상은 다 밝혀졌으며, 사건 조사에 따라 책임이 있는 세월호 선원과 청해진 해운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궁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서는 국가 기밀이라면서 언급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또한, 지금 광화문에서 속속 보도되는 세월호 집회에 대해서도 불법 시위에다가 폭력 시위이고, 시위대 사이에는 불순 세력이 섞여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견 차이는 좌와 우로 나누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몇 매체만 보더라도 확연히 나누어진다. '오마이뉴스'와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어보라.


 펄펄 끓는 용암 같은 시위대에 지금은 더 크게 반발하지 않고 있지만, 조금 이 열기가 식는 구석이 보이는 순간에 자칭 '우측'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또 다시 군복을 꺼내 입고 확성기로 "종북 빨갱이 세력은 물러가라!"이라는 말을 하면서 군국주의 속에 물든 엉뚱한 사상을 꺼내 들지 모르는 일이다.



 두 진영 모두 자신이 믿는 '정의'를 외치면서 앞으로 나서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직 여기에는 '이해관계의 갈등'과 '당연한 일의 부정과 인정'이라는 두 개의 문제만 존재하며, 이건 우리나라가 겪는 가장 큰 가치 충돌 중 하나이지 않을까?


 지금 난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책의 도입부에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인지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사람은 어떤 화면에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고, 언제나 우리 자신이 매우 개인적으로, 감정적으로 선별한 것만 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덴마크 출신 실용서 저자 토르 노레트랜더스는 이런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지했다고 믿는 것을 본다. 우리의 의식은 오직 주어진 해석만을 받아볼 수 있을 뿐, 결코 왜곡되지 않은 원본 데이터를 받아 볼 수는 없다. 어떤 일이 펼쳐질 때면 무의식적인 정보 처리 과정이 진행되면서 정보들을 이리저리 뒤틀어 놓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의 시뮬레이션, 가설, 해석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p43_우리는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그리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지금 우리 한국 사회는 그런 것들이 부딪히면서 서로가 옳다면서 끊임없이 몸을 부딪치고 있다. 나는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고, 정의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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