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저항해 자유를 선택했던 장자처럼 살아도 될까?
- 문화/독서와 기록
- 2014. 8. 20. 07:30
《장자처럼 살라》, 장자의 철학과 동서양의 철학을 만나볼 수 있는 책
우리는 삶을 살면서 '과연 이 일을 내 자유에 의해서 해야 하나? 아니면 막연한 의무감으로 해야 하나?', '오늘을 행복해야 하나? 내일을 위해 참아야 하나?'라는 선택의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다. 어떤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 중 한 명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건 그런 일이다.
지금 우리 한국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강제 징병제에 입각한 병역의 의무가 그 대표적인 예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어떤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더라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표를 가지고 있는 남성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의무다.
그 의무에는 선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의무 속에서도 선택지는 눈앞에 나타날 때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로 떠오른 임 병장 사건과 윤 일병 사건은 의무 속에 있는 다른 선택지를 선택해서 나타난 결과다.
자유로워 지고자 했던 사람은 살아남았지만, 의무 속에서 저항하지 못했던 사람은 죽고 말았다. 이런 이분법적이면서도 끔찍한 결과를 낳는 선택지를 강요하는 제도가 강제 징병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강제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꿔야만 하지 않을까?
ⓒSBS 뉴스
강제로 징병당해 군대로 끌려가더라도 애국심이 커지기는커녕 그곳에서 악마가 되어버리기도 하고, 그저 당했던 만큼 갚아주겠다는 복수심과 비인간성이 커지기도 하고, '반드시 저놈만은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죽여버리겠다'는 살의만 커진다. 징병제는 그것을 만들었다.
하물며 점점 출산율이 떨어지고, 청년층의 비율도 줄어드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모병제'에 대한 회의가 나오기도 하지만, 현대 전쟁은 수로 하는 게 아니라 무기로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한 명이 한 명을 죽이는 일이 전쟁이었다면, 요즘에는 한 개의 무기가 수백 수천 명을 죽이는 일이 전쟁이다. 그런데 왜 징병제를 고집하는가? 그건 어쩌면 그 제도를 바탕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악마들의 계책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것이다.
자유를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하지만 의무를 선택해 자유를 포기한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래서 군대라는 곳에서는 비인간적인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모두'라는 이름 아래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니까.
장자처럼 살라, ⓒ노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길게 새버렸지만, 내가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장자'라는 한 중국의 사상가에 대한 이야기다. 얼마 전에 우연히 읽을 기회가 생긴 《장자처럼 살라》에서는 이런 사회에서 사는 우리가 하는 행동과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여러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공자'와 '논어'를 다루는 책과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을 다루는 몇 권의 책을 읽어보았지만, 책의 제목에 '장자'가 들어가는 책은 처음 읽었다. 그래서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바탕으로 장자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줄 것인지 꽤 궁금했다.
하지만 책 자체는 다른 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자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많은 철학자의 이야기를 함께하며 그 여러 철학을 가지고 장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책이었다. 뭐, 부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사회의 본질을 지적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직접 자신의 경우로 돌아가 고민해보자. 내일의 이름을 위해 오늘 능력을 쌓는 데 몰두한느 삶,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미루는 일상이 반복되는 생활에서 진정 살아 있음을 느끼는가? 무려 15년 가까이에 이르는 청소년과 대학생 시절을 희생하며 원하는 직장에 들어간 지금 자신을 돌아보면 행복한가? 또한 이후 오랜 기간 오직 승진 경쟁에만 몰두하며 살다가 적지 않은 나이에 도달한 현실의 자신을 돌아보면 어떠한가? 혹은 자식의 성적과 남편의 승진을 인생의 목표처럼 여기며 그 오랜 세월을 육아와 가사에만 쏟아오다 문득 돌아본 자신은 또 어떠한가? 모두 인간 존재가 유한하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늘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두보가 그러했던 것처럼 허무한 감정에 휩사이게 된다. 장자가 "평생을 발버둥 치면서도 그가 이루어놓은 공은 하나도 없고, 나른히 일에 지쳤으면서도 그 일위 귀결은 알지 못한다면 어찌 가엾지 않겠는가?"라고 했듯이 말이다. 물론 장자의 지적이 지나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충분히 원하던 공을 이루고 사회적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는 의문 말이다. 확실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러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토록 극단적으로 희박한 확률에 오르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 있어도 삶이라고 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야 한다면 이는 가엾다는 말로는 오히려 부족한 비극일 것이다. (p93)
바로 윗부분이 그런 예 중 하나다. 늘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어떤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삶을 산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많은 젊은 세대, 아니,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전 세대를 아울러 많은 사람이 그런 삶을 산다. (내일을 위해 어제와 오늘을 포기하는.)
물론, 그런 삶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행복과 즐거움을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게 인생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저 뒤돌아보았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이었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장자와 두보의 이야기처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책을 읽었음에도 이상하게 난 이 책이 쉽게 읽어지지가 않았다. 경제학 도서도 쉽게 읽어지는 책이 아니었고, 마이클 샌델의 인문학 도서도 쉽게 읽어지는 책이 아니었다. 그래도 '흥미가 생기는 책'과 '생기지 않는 책'은 나눌 수 있는데, 이 책은 후자에 속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책에서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말이다. 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책이 너무 딱딱하다는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다른 책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지만, 이 책은 일방통행식이었다. 그래서 쉽게 지쳤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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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시대에 저항했던 장자에 대한 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 문제 중 하나인 강제 징병제를 가지고 왔다. 아직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이 시대에서 '모병제'를 외친다는 건 하나의 역적으로 찍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결코 잘못된 일은 아니다. 이런 시대이기에 비로소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모병제는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의 틀 속에서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징병제에 저항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필요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장자처럼 살라》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돈키호테의 꿈을 꾸고 있는 우리 대부분의 시각은 장자가 붕 이야기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작은 새의 사고방식에 해당한다. 지혜와 그에 적합한 행위와 덕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만한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한 가지 벼슬, 한 고을, 한 임금, 한 나라로 그 신임이 나아가는 것은 점차 큰 단위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란 이러한 과정 안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틀에서 벗어날 때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장자는 이를 좁은 시야 안에 갇혀 있는 작은 새와 같다고 한 것이다.
뒤돌아보면 우리의 일상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학생은 학교에서 성적으로 이름을 얻고, 직장인이라면 가장 빠른 승진으로 샐러리맨의 신화가 되고자 한다. 혹은 전문 경영인으로 이름을 날리거나, 사업을 한다면 규모를 키워 몇 대 기업 안에 들어가는 것을 꿈꾼다. 수직으로 서 있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하나하나 오르는 일이 인생의 목표가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신의 이름을 알아주길 갈구한다. 만약 돈키호테의 대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철이 없거나 패배자, 혹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페이지 52)
아마 지금 모병제를 이야기한다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군국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군 정부 시절의 영광에 취해있는 기득권이 만발하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서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나의 작은 공간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모병제는 반드시 필요하고, 빠르게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국방비'라는 이름 아래에서 개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돈을 꺼내 사람을 사람답게 대할 수 있는 인본주의가 군대에 자리 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야만 힘없이 고통 속에서 세상을 저주하며 죽어가는 사람의 넋을 기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웃고 있을 이 평범한 날에, 누군가는 새빨간 핏덩어리를 신음 속에서 뱉어내며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슴에 품은 채 '의무'라는 속박 속에서 시뻘건 눈을 뜨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이제 더는 생겨서는 안 된다. 국가가 '애국심'과 '의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그런 일이 지속해서는 안 된다. 윽박지르 건 애국이 아니라 독재다. 대통령의 호통 하나로 바뀔 세상이었다면, 이미 우리 세상은 수 천 번은 바뀌었을 거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자유가 없는 희망은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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