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잠시만 도망가자', 웹툰 작가 이종범이 전하는 나를 구하는 법
- 문화/독서와 기록
- 2018. 4. 5. 07:30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 잘해야만 했고 버텨야 했던 나를 구하는 법
내 휴대폰 잠금화면 사진은 어느 소설 속 주인공이 ‘더 노력해야 해, 더 노력해야 해, 더 노력해야 해’라는 말이 한 페이지 가득 채워진 장면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장면을 우연히 본 어느 사람은 ‘조금 무섭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왜 이런 장면을 잠금화면으로 해놓은 거야?’라고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조금 더 절박해야 한다. 이대로 멈춰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너무 적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담아서 ‘더 노력해야 해’라는 말을 잠금화면으로 했다. 볼 때마다 경각심을 가질 수 있도록.”
남이 보기에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노력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나’라는 인간이 사실 허세를 잘 부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이미 커다란 꿈을 이룬 것처럼 말하지만, 막상 나는 무엇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 그리고 아직도 끊임없이 방황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내가 한 노력만큼 보상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참아가면서 노력해도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정말 성공이라는 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시간 동안 반복하는 노력 끝에 우연히 손에 넣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노력할 수밖에 없다. 노력한다고 해서 노력만큼 보상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제자리에서 멈춰 아무것도 하지 못 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루저’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건 너무나 비참하지 않은가?
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나는 우연히 <말하는 대로>를 통해 사는 방법에는 조금 더 다른 방법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웹툰 작가 이종범이 말한 ‘도망쳐도 된다.’라는 말이었다. 오늘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웹툰 작가 이종범의 에세이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득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도망’이라는 게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고작 그거 하나 참지 못해서 살면서 뭐 하나 제대로 하겠냐?”라며 비난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를 읽어보면 아래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 세대가 가장 많이 하던 말이 있다.
“넌 할 수 있어, 이겨낼 수 있어.”
그리고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면 수많은 위인들이 이겨내고 극복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심지어 이런 유행어도 있었다.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거다.”
오죽하면 학창 시절 소풍과 수학여행을 대신해서 가는 곳의 이름이 ‘극기 훈련’이었을까. 그렇게 나이를 먹어서 군대에 갔더니 ‘하면 된다’가 공기처럼 흐르는 곳이었다. 그러고 나서 사회에 나왔더니 SNS와 인터넷, 서점에는 누군가가 극복하고 이겨내고 뭔가를 해낸 이야기들뿐이다. 그 누구도 도망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겁쟁이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도망자의 이야기는 누구도 하지 않고 누구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15년, 20년 동안 우리 모두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쓰러져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아무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렇게 말하게 된다. ‘도망가면 안 돼, 피하면 안 돼, 왜냐면 그건 패배자, 겁쟁이, 루저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본문 29)
이종범 작가가 책에서 말한 이 이야기는 우리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아주 잘 보여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반드시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하물며 꿈 또한 반드시 가져야 한다면서 ‘아직 꿈을 모르겠다면, 아무거나 집어서 해봐라.’라는 말을 들으면서 일단 시작했다.
물론,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해보아야 하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일까?’, ‘왜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라는 질문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알지 못한 채 고른 선택지는 내 선택지일 수가 없다.
문제는 그런 고민을 하는 시간조차 우리는 시간 낭비라고 느낀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마치 100m 전력 질주를 하는 것처럼 달려나가고 있는데, 나 혼자 ‘지금 이 길은 아닌 것 같아.’라며 다른 길로 빠지는 일은 그야말로 도망친다고 여길 수 있다. 우리가 도망치기 시작하면 금세 낙인이 찍힌다.
“저 녀석은 대체 뭐가 잘났다고 혼자 저러고 있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타인의 시선이다. 오랫동안 타인이 정한 기준으로 평가를 받아 온 한국 청년 세대는 내가 남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괜히 나 혼자 다른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릴 것 같고, 괜히 나 혼자 튀는 짓을 했다가 모난 돌이 정 맞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부스러질 것 같은 고통을 겪더라도,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슬럼프에 빠지더라도 일단 이 악물고 버틴다. ‘악으로 깡으로’라는 말처럼, 일단 버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 더욱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인다. 마치 남아있는 ‘여유’라는 마음을 다 태워버리려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슬럼프는 이것에 가깝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는 이유를 잃어버린 것.’ (본문 104)
슬럼프라고 느껴질 때 가만히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에 마련해두었던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이제 더 이상 내게 의미 없어진 건 아닐까. 새로운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이미 기한이 만료된 이유를 연료 삼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먼저 죄책감부터 갖다 버리기를 권하고 싶다.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다. 당신이 꿈을 잃고 현실적으로 변해버렸다는 뜻도 아니고 일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뜻도 아니다. 그건 그냥 “내가 갖고 있는 이유의 유통기한이 다 됐구나. 다음 이유를 찾을 때가 됐구나”라는 의미의 표지판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영원히 하며 고통 받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느낌 대신 상당히 산뜻한 기분이 된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는 뜻이니까. (본문 109)
웹툰 작가 이종범은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라는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 늘 잘해야만 하고 버텨야만 했던 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잠시 도망치는 일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도망치는 일은 비겁한 일도 아니고, 죄책감을 가질 일도 아니다. 목적지를 향해 잠시 돌아가면서 호흡을 가다듬는 일이다.
어떤 작가는 책 제목을 통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고 말한다. 확실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진 어려움은 천 번, 아니, 백만 번 정도 우리를 뒤흔들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직하게 버티면서 앞을 향해 똑바로 전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더라도 괜찮다.
우리의 목표는 좋은 작품으로 작가 생활을 하고 싶은 것이지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경제적 안정성이라는 것은 정말로 엄청난 목표다. 그걸 우선 과제로 선택했다면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그 엄청난 것을 선택한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 스스로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 대가는 천천히 가야 하는 전술보행의 답답함이다. 그러니 죄책감을 갖지 말고 일단 스마트하게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본문 60)
그동안 나는 ‘더 노력해야 해’, ‘나는 잘 할 수 있어’라고 외치며 나를 몰아붙이기 바빴다. 그동안 내가 허투루 보낸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나태해지는 내 모습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로봇이 아니다. 잘 하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서 억지로 마음을 태워버리면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오늘도 ‘부모님이 저렇게 기대하는걸. 난 더 잘해야 해’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람들에게 웹툰 작가 이종범의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를 추천하고 싶다. 혜민 스님이 말씀하신 멈추면 때때로 보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잠시만 도망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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