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라는 적, 인생의 전환점에서 버려야 할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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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는 항상 우리가 높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를 끌어내리기 위해 속삭인다


 사람은 살면서 어느 정도 성공의 궤도에 오를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성공의 궤도에서 꾸준히 상승하는 것과 하락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경계의 여부다. 사람은 자신을 보지 못하면 곧장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사람을 가장 위태롭게 하는 것은 자만심이다. 사람이 자만심에 빠지게 되면 자신을 똑바로 보지 않게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겸손한 자세로 도전하고 주변 사람을 대했지만, 자기도취에 빠지게 되는 순간 ‘겸손’이라는 것은 사라져버린다. 겸손이 사라지면 우리는 곧 허황한 욕심에 빠질 확률이 무척 높다.


 얼마 전에 한국 사회에서는 고려대의 한 대학생이 ‘학벌주의 찬성’ 글을 올리면서 논란이 되었다. 그 글의 저자는 ‘나는 노력해서 고려대에 왔으니, 당연히 그만큼 더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취지였다. 이 글에 대해서 팩트 폭력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나는 그 저자에게 아래의 글을 소개하고 싶다.

 

아, 당신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라고? 그런데도 참아야 하느냐고? 당신의 학력이 아무리 좋아도 세상이 당신 것이라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대학교인데도? 당연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을 아무렇게나 대할 것이고, 당신에게 고함을 질러 댈지도 모른다. 당신이 백만장자일 수도 있고 장식장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지금 도전하는 이 새로운 장에서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당신이 얼마나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당신의 인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무관심에서부터 노골적인 방해에 이르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에 맞닥뜨릴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본문 99)


 오늘 여기서 소개할 <에고라는 적>이라는 책에서 읽은 이 글은 ‘좋은 학벌’이라는 것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에게 딱 좋은 글이다. 좋은 학벌이 경쟁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고려대학교보다 더 좋은 서울대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아래에서 시작한다. <에고라는 적>의 저자가 말한 대로 세상은 ‘무관심부터 노골적인 방해에 이르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임시적인 답을 구하고자 <에고라는 적>을 소개하고 싶다.



 <에고라는 적>을 읽기 전에 먼저 ‘에고’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부끄럽게도 나는 영어로 적힌 ‘EGO’의 뜻을 몰라 영어 사전을 검색해보아야 했는데, 영어 사전에서는 ‘자부심, 자기도취’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었다. 즉, 책의 제목에서 언급한 ‘에고’는 자만심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책에서 ‘에고’를 이렇게 정의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에고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 이 책에서는 이것을 에고의 정의로 사용할 것이다. 거만함이 그렇고 자기중심적인 야망이 그렇다. ... 합리적인 효용을 훌쩍 뛰어넘어 그 누구(무엇)보다 더 잘해야 하고 보다 더 많아야 하고 또 보다 많이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에고이다. (본문 26)


 얼핏 글을 읽으면 ‘에고’라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사는 데에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주 접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자기 자신을 믿어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의 수준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믿는다는 것은 ‘자존감이 높다’, ‘자신감이 있다’는 말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자만심’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야망은 우리가 목표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냉정함을 잃게 하고,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난 재능이 있어’라는 착각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저자는 이러한 에고에 휘둘려 자기가 하는 일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면 이성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기 무척 쉽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에고라는 적>에서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면서 스스로 대해 명확히 인식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당신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기란 불가능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한 말이다. 만약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결코 그것을 배울 수 없다. 당신이 자만심과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해 질문하지 않는다면 결코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최고라 확신하는 사람은 절대 발전할 수 없다. (본문 71)



 <에고라는 적>을 읽다 보면 우리가 항상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 갖은 감정들도 자기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열정’이다. 보통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동기부여, 끈기, 열정, 노력 등의 요소를 꼽는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당신이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중요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도 바로 그 열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열정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본문 75)


 책에서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왜?’라는 의문을 품었다. <에고라는 적>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사례는 확실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는데, 저자는 우리가 열정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 열정이 ‘이성을 잃어버리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즉, 저자는 현실주의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당신은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이것은 이상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사고이자 태도이고 그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 거리두기이자 균형이다.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한 이성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양식이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맨 전저 시작할지, 어떤 방법이 조금 더 효율적인지와 같은 문제에서 올바르게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위대한 열정은 희망이 없는 만성 질병이다.” 괴테가 했던 말이다. 신중하고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은 흔들림이나 아픔을 넘어서서 제 갈 길을 잘 헤쳐나간다. 이들은 열정으로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대신 전문가들을 고용하고 이들을 활용한다.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될 것인지 묻고 비상 상황에 대비한 계획을 미리 세워둔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경주에 나선다. (본문 81)


 지나친 열정은 자신의 상황을 똑바로 판단하는 냉정함을 잃어버리게 한다. 야구에서 팀이 패배 위기에 몰린 상황 속에서 다음 타자로 찬스를 이어줄 생각을 하지 않고, ‘여기서 내가 해결한다.’는 잘못된 열정을 발휘하면 헛스윙 삼진 혹은 찬스를 날려버리는 병살타를 기록하며 패배로 이어질 수도 있다.


 타자 자신이 지금 투수 공략에 자신이 없다면, 찬스에 강한 다음 타자에게 이어주기 위한 플레이를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열정이라는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지나친 열정은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에고’라는 적이다. 옛말에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해야 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저자는 책에서 자만심과 에고가 이렇게 말한다고 독자에게 경고한다.


* 나는 기업가이다. 홀로서기를 꿈꾸며 독립했기 때문이다.

* 나는 이번에 승리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내가 선두이기 때문이다.

* 나는 작가이다. 무언가를 출판했기 때문이다.

* 나는 부자이다. 제법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 나는 특별하다.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그러나 어디에나 이런 태도를 경계하라는 교훈이 있다. 암탉이 알을 낳기 전에 미리 병아리를 세지 마라, 물고기를 잡기 전에 먼저 물고기 요리를 하지 마라, 토끼 요리를 하려면 토끼를 먼저 잡아야 한다, 자만이 길어지면 결국 낭패를 당한다 등의 가르침들이다. 이런 태도는 한 마디로 사기(fraud)와 같다. (본문 112)


 <에고라는 적>을 읽는 동안 나는 간혹 나 자신이 에고에 빠진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다. 때때로 나 자신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일을 엉망으로 망가뜨린 일이 있었고, 때로는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임했다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에고’에 휘둘린 상태였다.



 우리가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동기부여가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노력을 지속할 수 있는 끈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실패를 하면서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운 좋게 작은 성공을 하면서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다. 이를 현명하게 대처해야 꾸준히 잘 할 수 있다.


 대체로 많은 사회가, 특히 그중에서도 한국 사회는 ‘결과’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가 짙다. 언제나 나와 타인의 결과를 비교하면서 ‘저 사람은 저 정도로 했는데,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냐?’라는 비아냥으로 열등감을 부추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타인의 결과와 자신의 결과를 비교하며 과욕을 품기도 한다.


 책에서 저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성공한 길을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당신이 이룬 일이 시시해보일 만큼 더 크게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신이 얼마나 자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에고가 속삭이는 부추김과 다른 이들의 성공 때문에 당신의 성과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벌어지고 이 과정은 끝도 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려고 한층 더 빠르게 발을 놀리지만 사실은 제각기 서로 다른 이유로 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똑같이 맞추려 애쓰기보다 더 나은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경쟁은 분명 인생의 중요한 요소다. 시장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도 경쟁이며, 인류가 이룩한 가장 인상적인 업적들 뒤에도 경쟁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지금 누구를 상대로 경쟁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는지, 또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본문 162)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돌아간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단순히 우리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왜 하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자리에서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결과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때때로 내가 만든 결과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 왜소해 보여 주눅이 들거나 그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지나친 자의식, 즉, ‘에고’라는 적이다.


 오늘 읽은 <에고라는 적>은 우리가 성공, 혹은 꿈이라고 말하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에고’라는 적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에고는 워낙 간사해 잘 해내고 있는 순간에 달콤한 말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부디 당신이 ‘에고’라는 적을 떨쳐 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걸 누가 알아주느냐고? 과연 누가 알아주는 게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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