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경비원 사망, 차별주의가 낳은 끔찍한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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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관계, 그리고 돈과 사람의 관계의 그 비극 속에서


 얼마 전, 서울의 한 아파트에 근무하던 경비원이 차량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한 일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분신자살을 시도했던 경비원 아저씨의 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정말 잔인한 일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이루어진다는 것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아파트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의 냉혹한 행동에 혀를 내둘렸다,


 이런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경비원 아저씨는 그 목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분신자살 시도는 여러 자살 방법 중에서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손꼽힌다. 왜냐하면, 화상을 입는 그 순간의 고통이 정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만약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은 죽는 것 이상으로 괴롭다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그 같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경비원 아저씨는 살아있는 것이 괴로웠던 거다. 도대체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런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저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두고 '저 아파트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비인격적인 사람들.' 같은 결과를 내기보다 '우리 주변에 저런 약자는 없는가?'는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슬픈 사례의 주인공이 된 경비원 아저씨처럼, 한 가정의 소중한 아버지이자 한 명의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얼마 전에 뉴스로 보도된 2년간 식물인간으로 있다 깨어난 한 이등병의 '구타를 당했다'는 폭로로 밝혀진 것처럼 세상은 이 사실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도대체 어쩌다 우리 사회는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일까? '정이 많은 나라'이라며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낯선 사람에게도 친절히 대하는 것으로 유명한 우리나라가 사실은 이렇게 속은 썩어 문드러지게 되어버렸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고민해야 한다. 외면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나는 이 문제의 원인을 '차별주의'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데에 아주 도가 튼 사람들이 많다. 성적으로 아이들을 차별하면서 급식을 차례대로 나눠주는가 하면, 임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로 나누어 놀이터 이용에 제한을 두기도 하고, 호감도에 따라 어떤 연예인의 잘못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냥 기가 막힌다는 표현을 넘어서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는 생각도 들게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다른 것을 배척하는 모습은 앞으로도 꾸준히 우리나라 사회가 좀처럼 발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이런 차이를 빌미로 집단 따돌림을 하는데, 어른은 오죽하겠는가?


 논어에는 '화이부동 동이불화'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울리기는 하되 같아지지는 않고, 같아지기는 하되 어울리지는 못한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여기서 어울린다는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빛과 향이 있다는 말이고, 같아지기는 하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과 향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한국에서 우리 한국 사람이 꼭 가슴에 심어두어야 할 말이다.


 한국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고유한 빛과 향을 가지기보다 언제나 같아지기만 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이 차별주의가 유독 강하게 사회에서 강한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그 차별주의로 사람이 자신보다 조금 약한 입장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멸시하고, 돈 줬으니 때려도 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나오는 거다. (어휴)



 이런 차별주의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발생하는 게 아니라 어른(부모)가 아이에게 답습한다는 데에 또 큰 문제가 있다. 많은 부모가 "저 아이는 엄마가 없는 아이야. 같이 놀지 마.", "저 얘는 공부를 못하니까, 너한테 도움이 안 된다." 식으로 차별을 가르치고, 자신의 아이가 그런 비인간적인 교육 가치 속에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우리 아이는 착한데, 나쁜 친구에게 물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여러모로 기가 막히는 일인데, 이런 일이 너무 흔하다는 게 안타깝다. 어제 블로그에 소개한 천종호 판사님의 소년 재판 이야기를 담은 책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를 읽어보면, 부모들의 심각한 문제를 읽어볼 수 있다. 비록 가정 해체의 자녀가 아니더라도 왜 평범한 가정 속, 부유한 가정 속의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지를 말이다.


 우리는 왜 경비원 아저씨가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따른다는 분신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등병은 억울하게 각목으로 맞아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었음에도 가해자는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고 진상 규명은 되지 않았는가…! 그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 차별주의가 낳은 끔찍한 괴물들이 사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과연 그런 사람처럼 당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으니까.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일은 부모의 그릇된 가치관 속에서 세대를 이어서 거듭되고 있다. 나는 오늘도 간절히 바란다. 부디 사람이 차이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내가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사람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기를. 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거울


대학교 휴게실에서 여학생 두 명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네가 해 오기로 했잖아.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데 어떡할래?"

"미안해,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어제 우리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했거든. 새벽까지 병원에 있느라 시간이 없었어. 정말 미안해."

과제물을 해 오지 못한 친구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이제 어떡하니? 시간도 없는데……."

"내가 조교실에 찾아가서 내일까지 제출하면 안 되겠냐고 사정해 볼게."

"소용없어. 하루라도 늦으면 교수님이 점수 안 준다고 지난번에 분명히 말했잖아."

"그럼, 어쩌지……."

친구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그 과제물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너도 잘 알잖아. 사정이 있어도 할 일은 했어야지. 나 이번에 장학금 꼭 받아야 한단 말이야."

"우리 오빠 많이 다쳤어. 나 오늘 학교에도 못 오는 건데 과제물 약속 때문에 겨우 온 거야……."

"너는 아직도 뭘 잘못한 줄 모르는구나. 어제 말고도 시간은 충분했었잖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엎드려서 빌기라도 해야 네 마음이 풀리겠니? 나도 지금 너무 속상해. 정말 미안하게……."

친구의 간절한 사과에도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쩔쩔매는 친구에게 그녀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내 과제물은 나 혼자 알아서 할 거야. 네 건 네가 알아서 해. 너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힘들고 상처받는다는 것도 곰곰이 생각해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잠시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또 다른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조용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니?'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도 때로는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연탄길3_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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